일상화 된 프로스포츠 ‘합숙 시스템’…폭력의 온상 될 가능성 큰 이유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16일 17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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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선수들은 사흘만 풀어놓아도 엉덩이에 살찌는 소리가 들리는 법이다.”

1964년 도쿄(東京)올림픽 때 일본 여자 배구 대표팀에 금메달을 안긴 다이마쓰 히로부미(大松博文·1921~1978) 감독이 남긴 말이다. 다이마쓰 감독은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이 동메달을 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대표팀 고문을 맡았다. 대표팀에서 당시 선수들에게 1주일간 휴가를 주자 “어쩌려고 그렇게 오래도록 놀게 하느냐”면서 이렇게 말한 것.

이렇게 노골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지도자는 이미 오래 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여자 프로배구, 프로농구 선수에게 ‘합숙’은 일상화되어 있다.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팀 대표로 나온 선수가 감독에게 ‘우승하면 투박(2일간 외박)을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집에서 출퇴근하는 게 일반적이 된 같은 종목 남자 팀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같은 모기업을 둔 남자 팀과 여자 팀을 오가면서 프런트로 일한 관계자는 “여자 선수들은 프로 입단 후에도 계속 고교 생활을 이어간다고 보면 된다”면서 “처음 여자 팀에 왔을 때 지도자는 물론 선수들도 합숙을 당연하게 생각해 이상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학창시절부터 쌓인 경험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초중고 운동부에게 합숙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옛 체육과학연구원)에서 펴낸 ‘학교운동부 합숙훈련 실태조차 및 개선방안’에 따르면 대학입학 특기자 제도가 생긴 1972년 이후로 대입을 목표로 경기력을 끌어올린다는 목적으로 고교 운동부에 합숙훈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국체육대회와 맞물려 관행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고교 운동부는 전국체전에 시도 대표로 참가하게 되고, 이런 운동부가 있는 학교는 시도 내 ‘거점 도시’에 한두 곳만 존재하기 때문에 학생 선수가 집을 떠나 합숙소에서 생활하면서 운동을 하는 게 일반적인 풍경이 된 것이다.

합숙 훈련이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합숙소가 학교 폭력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19년 발표한 ‘학생선수 인권침해 실태 전수조사 결과’에 따르면 합숙 경험이 있는 경우 학교 폭력 피해자가 10%포인트 정도 늘었다. 운동 뿐 아니라 생활도 함께 하기 때문에 그만큼 피해자가 폭력에 노출될 우려가 늘어나는 것이다.

이기광 국민대 교수(체육학)는 “국가대표 선수촌 성공 사례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합숙 훈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합숙소 생활이 통제가 되지 않는 현재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만약 지도자가 ‘에이스 선수’의 폭행을 눈감아주면 그 세계 안에서는 합법적으로 폭행이 이뤄지게 되는 셈”이라면서 “학생 선수를 기숙사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게 하는 등 합숙 시스템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폐쇄회로(CC)TV 설치를 통해 피해 예방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문체부는 지난해 고 최숙현 선수 사망을 계기로 개정된 국민체육진흥법이 19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학교 및 실업팀 등의 체육시설에 CCTV 설치를 추진하기로 했다. 또 6월부터는 실업팀들이 합숙소 운영기준을 마련하도록 했다. 실업팀은 합숙소 운영 시 인권을 보장해야 하고, 인권보호에 대한 내용을 포함한 실업팀 운영규정을 마련해 지자체에 보고해야 한다.

한편 16일에도 한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초등학교 시절 3년간 나를 괴롭혔던 선수가 프로배구 팀에 신인 선수로 입단했다는 소식을 들고 해당 팀에 연락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해당 팀 관계자는 “아직 자세한 사항을 파악 중”이라고 말했다. 이 선수는 고교 시절 배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합숙 시스템과는 큰 관련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스포츠계 폭력과 관련해 이날 국무회의에서 “법과 제도가 현장에서 잘 작동해 학교부터 국가대표 과정 전반까지 폭력이 근절되도록 각별히 노력해 달라”고 재차 당부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이원홍 전문기자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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