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가 끄덕여지는 한화 송창식의 은퇴식[김배중 기자의 핫코너]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15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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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가분하죠(웃음).”

15일 프로 유니폼을 벗기로 결정한 한화 투수 송창식(35)의 목소리는 그의 표현처럼 무겁지 않았다. 그는 “한계를 느끼고 오랜 생각 끝에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아쉬울 게 없다”고 말했다. 2004년 2차 지명 1라운드 2순위로 한화에 지명된 뒤 ‘원 팀 맨’으로 활약한 그의 시대도 이렇게 저물었다.

송창식의 KBO리그 통산 성적은 43승 41패 22세이브 51홀드 평균자책점 5.31로 평범하다. 유관중 시기에 맞춰 은퇴식을 준비하겠다는 한화 구단의 움직임이 호들갑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송창식의 야구인생을 돌아보면 구단의 ‘예우’에는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고교시절만 해도 여느 프로진출 선수들의 ‘라떼스토리’ 못지않게 송창식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당시 전국대회 1, 2회전 탈락이 익숙할 정도로 전력이 세지 않았던 세광고는 2학년 때부터 초고교급으로 성장한 송창식 덕에 그가 등판하면 강팀도 무섭지 않은 전력이 됐다. 그가 3학년이던 2003년 당시 세광고는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우승의 성적을 거뒀는데, 송창식 홀로 거뒀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회전부터 매 경기에 등판한 송창식은 150km에 육박하는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등을 섞으며 완투행진을 벌였다.

고교시절 혹사의 여파가 컸을까. 2004년 프로데뷔 첫해 전반기에만 7승을 거두며 강력한 신인왕 후보로 떠오르기도 했던 송창식은 후반기 1승만 추가한 채 8월 팔꿈치 부상으로 시즌아웃 됐다. 그해 26경기에 출전해 140과 3분의 1이닝을 투구하며 8승 7패 평균자책점 5.13의 성적을 거뒀다. 투구이닝, 승수는 송창식의 커리어하이 기록이기도 하다.

신인시절 완투승(5월 29일 LG전 9이닝 2실점)을 거둔 송창식. 동아일보DB
신인시절 완투승(5월 29일 LG전 9이닝 2실점)을 거둔 송창식. 동아일보DB

하지만 많은 다른 투수들이 경험하는 팔꿈치 부상, 수술은 송창식에게 ‘맛보기’에 불과했다. 2007시즌 4이닝 투구에 그친 송창식은 이듬해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초반만 해도 투구하는 오른손의 혈행장애 때문으로 알려졌는데 사실 더 심각했다. 손가락 끝이 썩어 들어가는 ‘버거씨병’을 앓았던 것. 송창식이 은퇴 직후 모교 세광고에서 치료를 병행하며 코치로 일할 당시 세광고 선수였던 윤정현(27·키움)도 “상처가 깊어 뼈가 보인다고 느껴질 정도였다”고 표현했다. 송창식도 “6개월 동안 상처가 아문 날이 없어 힘들었다”고 회상한다.

다른 선수들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치명적인 부상을 송창식은 ‘극복’했다. 2010년 5월 복귀를 선언하며 마운드에 오른 송창식은 불펜투수로 12경기를 소화하며 평균자책점 4.08을 기록했다. 강속구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유연했던 투구 폼도 다소 뻣뻣해졌지만 전례 없는 부상을 겪은 뒤 이를 극복해 마운드에 복귀한 자체만으로도 기적이라 평가할 만 했다.

이후 암흑기를 겪은 한화 마운드에서 송창식의 활약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주로 구원으로 짧은 이닝을 소화했지만 땜질 선발이 필요할 때 이를 마다하지 않으며 마운드를 꿋꿋하게 지켰다. 2015시즌에는 64경기 109이닝을 소화했는데, 64경기 이상을 소화한 불펜투수 중 그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한 선수는 큰 부상 경력이 없는 권혁(78경기 112이닝·당시 한화)밖에 없었다. 이후 2017시즌까지 3년 동안 매 시즌 60경기 이상을 소화하며 ‘투혼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당시 혹사 논란이 따랐지만 “공백기가 있었기에 마운드에 서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며 덤덤히 마운드를 지켰다.

2010년대 암흑기를 겪은 한화마운드를 꿋꿋하게 지킨 송창식. 동아일보 DB
2010년대 암흑기를 겪은 한화마운드를 꿋꿋하게 지킨 송창식. 동아일보 DB

부상 복귀 후 몸 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던 송창식은 큰 부상을 겪지 않았지만 혹사 여파를 결국 피해가지는 못했다. 2018시즌 12와 3분의 1이닝, 2019시즌 3분의 1이닝만 소화한 그는 올 시즌 1군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한국나이 서른여섯, 투혼의 아이콘도 세월을 거스르기 힘들었다. 송창식은 “스프링캠프를 마치고도 구위가 올라오지 않아 은퇴라는 단어를 두고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프로시절 마운드에 한번이라도 더 오르려 외로운 사투를 벌였지만 마운드를 영영 내려올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지난해 12월 결혼식을 치렀고, 결혼 전 쌍둥이 자녀도 얻었다. 재활에 전념하느라 ‘결혼식’을 제때 못 챙겨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한 송창식은 “당분간 가족에게 전념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0년 복귀 이후 10년 동안 마운드를 지키게 한 송창식의 오른손. 버거씨병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졌다. 송창식 제공
2010년 복귀 이후 10년 동안 마운드를 지키게 한 송창식의 오른손. 버거씨병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졌다. 송창식 제공

투혼의 아이콘은 당분간 ‘육아의 아이콘’에 도전한다. 하지만 첫 은퇴선언 직후 모교에서 후배들을 양성한 것처럼 언젠가 현장으로 돌아올 거다. 그의 야구인생역경은 불투명한 미래로 불안해하는 어린 야구선수들에게도 많은 귀감이 될 거다. 그렇기에 ‘기록’이 성공적이지 않았을지언정 보람찬 프로생활을 보낸 송창식의 ‘은퇴식’도 필요하다. 그의 성공적인 육아와 지도자로서의 현장복귀를 기원한다.

김배중기자 wante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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