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90% 잘라냈지만 목소리는 100% 살린 그 청년, 평창에 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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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겨울스페셜올림픽 D-1
“세계를 향해”… 29일 스페셜올림픽 개막식서 애국가 부르는 박모세씨

지적장애와 지체장애를 함께 갖고 있는 아들은 노래를 부를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엄마는 노래하는 아들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 노래가 아들의 전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29일 평창 겨울스페셜올림픽 개막식에서 애국가를 부를 박모세(21·왼쪽)와 어머니 조영애 씨(49)가 손을 잡은 채 활짝 웃으며 걷고 있다. 수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지적장애와 지체장애를 함께 갖고 있는 아들은 노래를 부를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엄마는 노래하는 아들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 노래가 아들의 전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29일 평창 겨울스페셜올림픽 개막식에서 애국가를 부를 박모세(21·왼쪽)와 어머니 조영애 씨(49)가 손을 잡은 채 활짝 웃으며 걷고 있다. 수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아기를 몰래 보는 게 아니었다. 회복실을 빠져나온 엄마는 신생아실로 향했다. 가족들이 만류하던 일이었다. 어차피 죽을 아이, 차라리 안 보는 게 마음이 덜 아플 거라는 이유에서다. 머리로는 수긍을 했지만 마음이 가만히 있게 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아픈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커튼 사이로 뭔가를 잔뜩 머리에 씌워 놓은 신생아가 보였다. 이름표를 확인하지 않았어도 자신의 아기라는 것을 직감했다. 울면서 기도했다. ‘아기를 꼭 살게 해주세요. 살아서 눈 한 번만 마주치게 해 주세요.’ 안 봤다면 모를까. 짧은 시간 아기는 이미 엄마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

“뇌가 밖으로 흘러 나왔습니다. 낳아도 살 수 없어요.”

1992년 봄. 임신 5개월이던 조영애 씨(49)는 믿기 어려운 얘기를 들었다. 의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이 상황에서 출산한 산모는 없습니다. 유산을 하시죠.”

태아는 뇌류(腦瘤)였다. 뒤쪽 머리뼈가 없어 그 틈으로 뇌가 흘러 나왔다. 2년 전 큰딸을 자연분만으로 건강하게 출산했던 조 씨였다. 순간 아기를 임신하자마자 열병을 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약을 먹으면 안 될 것 같아 이를 악물고 일주일을 견뎠다. 그게 문제가 됐던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마 뒤 다시 검진을 받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내게 준 생명 미리 해하지는 말자.’ 유산을 놓고 방황하던 엄마는 마음을 굳혔다. 그해 8월 4일 아기는 세상 빛을 봤다. 머리 바깥으로 머리만 한 뇌가 나와 있었다.

“수술을 해도 죽고 안 해도 죽을 겁니다.”

의사의 말은 이번에도 야속하게 들렸다. 제왕절개 수술 후 회복실에 있는 엄마를 대신해 아빠 박웅기 씨(51)가 물었다.

“정말 1%의 가능성도 없습니까.”

“없습니다.”

“의사가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합니까.”

아빠는 의료진과 한바탕 언쟁을 벌였다.

수술을 해도 죽는다고 했지만 그대로 아기를 보낼 수는 없었다. 사흘 뒤 아기는 수술을 받았다. 대뇌의 70%, 소뇌의 90%를 절단했다. 의사는 말했다. “뇌의 대부분을 잘라냈기 때문에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할 겁니다. 장애가 너무 심해 살 수 없을 겁니다.”

태어나자마자 대수술을 받은 아기는 머리를 실밥으로 잔뜩 봉한 채 인큐베이터로 들어갔다. 엄마가 가족 몰래 아기와 처음 만난 건 그 수술 다음 날이었다.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아기의 이름은 박모세. 가족들이 다니던 용인 구성성결교회의 목사님이 지어줬다. 홍해를 갈랐다는 그 ‘모세의 기적’이 아기에게 일어나길 바라서였다.

아들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친정에 가 있던 엄마는 한동안 병원에 가지 못했다. 죽었다는 소식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다. 출산 후 한 달이 좀 지났을 때 병원으로 오라는 소식을 들었다. 낳았을 때 3.06kg이었던 아기의 몸무게는 2.2kg으로 줄어 있었다. 울어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래도 살아 있었다. 엄마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다.

생후 18개월쯤 모세는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더니 숨을 쉬지 않았다. 뇌수가 흐르지 않아서였다. 다시 큰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 부탁해 모세와 함께 중환자실에 있던 엄마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머리 두 곳에 큰 관을 꽂고 입에는 산소호흡기를 부착했어요. 몸에도 각종 튜브와 집게가 주렁주렁 매달렸죠. 어디 한 군데 만질 곳이 없었어요.”

수술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 두 차례 더 뇌수술을 받았다. 뒤틀린 다리의 교정 수술도 두 차례 받았다. 다리 수술 때 성장판을 건드린 탓에 모세는 키도 잘 크지 않았다. 특히 몸의 오른쪽은 눈도, 귀도, 손도, 다리도 장애가 심했다.

생명을 유지한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세에게 두 번째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모세가 다섯 살 때였다. 엄마는 그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갑자기 말문이 터졌어요. 이전까지 ‘엄마’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던 아이가 주기도문을 줄줄 외우는 거예요. 듣고 기억해 뒀던 모든 소리를 따라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노래는 나의 힘, 나의 삶

말을 시작하자 노래가 다가왔다. 모세는 일곱 살 때부터 노래를 불렀다. 들은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만 해도 대견하다고 생각했던 가족들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다.

2001년 삼육재활학교 초등과정에 입학한 모세에게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장애아 학부모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던 모세를 당시 김원길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총재가 보고 여자프로농구 경기에서 애국가를 불러 달라고 초청을 했다. 모세의 ‘애국가 데뷔 무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많은 관중 앞에서 애국가를 열창한 모세에게 감동을 받은 김 총재는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벗어 줬다.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후 노래는 모세의 전부가 됐다. 2007년부터는 수원시 장애인합창단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복지단체 사랑나눔위캔에서 주최한 ‘셰어 러브(Share Love)’ 캠프에 참가했다. 경기 용인시 송담대에서 장애·비장애 학생이 함께 생활하며 국내 정상급 예술인들의 레슨을 받는 행사였다. 사랑나눔위캔은 나경원 스페셜올림픽조직위원장이 만든 단체. 캠프 발표회 때 모세를 눈여겨봤던 나 위원장은 캠프가 끝난 뒤 경북 경산시에서 열린 한국스페셜올림픽 전국하계대회 개막식에서 애국가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엄마는 “모세가 노래할 수 있도록 그런 큰 자리를 마련해 준 게 너무 고마웠다”고 말했다.

사실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노래뿐이다. 일상생활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하기 힘들다. 중증 장애인을 아들로 둔 엄마는 그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박모세는 악보를 볼 수 없다. 대신 귀로 들은 음악을 그 멜로디와 가사 그대로 따라 부른다. 25일 수원의 한 교회에서 박모세가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수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박모세는 악보를 볼 수 없다. 대신 귀로 들은 음악을 그 멜로디와 가사 그대로 따라 부른다. 25일 수원의 한 교회에서 박모세가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수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모세가 살고 있는 경기 수원시 영통구 하동에서 경기 광주시에 있는 학교까지는 약 35km. 그나마 1년 전에 이사를 하면서 10km 정도 거리가 줄었다. 매일 아침 차를 몰고 모세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엄마는 기름값을 아끼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수업이 끝나는 오후 3시 30분까지 학교에서 기다린다. 이후에도 모세가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항상 그 옆을 지킨다. 그런 엄마에게 요즘 걱정거리 하나가 생겼다. 다음 달 고교 과정을 졸업하는 아들의 진로 때문이다. 모세는 지난해 한 대학 실용음악과 수시 모집에 지원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대학 진학을 이유로 장애인복지단체 ‘두드림’에서 지원했던 성악 개인교습도 받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다는 건 장애학생과 그 부모로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어려움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애국가

25일 오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의 한 교회. 모세는 수원시립합창단 백정태 씨(40)의 지도로 노래 연습을 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저를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세가 밝게 인사를 했다. 아직 어린아이처럼 목소리가 맑다. 학교에서도 인사 잘하는 학생으로 유명한 모세다.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인사는 했지만 질문이 이어지자 선뜻 대답을 못한다. 아는 얘기, 들었던 얘기는 기억을 하고 대답을 해도 그렇지 않은 경우 반응이 늦다. 눈도 오른쪽은 거의 보이지 않고 왼쪽도 희미하게 사물을 짐작할 뿐이다. 모세의 머리에는 지금도 관이 박혀 있다. 뇌수를 흐르게 하기 위해서다. 거기에 연결된 튜브는 왼쪽 귀 뒤편을 통해 목을 지나고, 위까지 내려간다.

교회 안은 추웠다. 점퍼를 벗고 노래 연습을 하는 모세에게 춥지 않으냐고 물었다.

“안 추워요. 노래를 하면 행복하니까요.”

29일 막을 올리는 2013 평창 겨울 스페셜올림픽. 박모세는 강원 용평돔을 가득 채운 4000여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애국가를 부른다. 그 모습은 전국에 생중계될 예정이다.

평소 목소리와 달리 우렁찬 음성으로 노래를 하던 모세가 잠시 쉬는 틈을 타 말했다.

“엄마가 그러는데요, 엄마는 저와 함께 있을 때 제일 행복하시대요. 맞죠, 엄마?”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세는 다시 노래 연습을 시작했다.

“살아만 달라고, 살아서 엄마 옆에만 있게 해 달라고 했는데 이런 기쁨까지 주네요.”

노래하는 아들을 지켜보던 엄마의 뺨에 복숭앗빛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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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이승건 기자 why@donga.com
#스페셜올림픽#개막식#애국가#박모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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