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혁 “팬에 감사…난 행복한 선수”

동아일보 입력 2010-07-26 14:17수정 2010-07-26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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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동아일보 자료사진
그가 떠난다. 188cm, 95kg의 위풍당당한 체구로 언제까지나 쉼 없이 그라운드를 누빌 것 같았던 그도 세월의 무게를 피하기는 힘들었나보다.

프로야구 현역 최고령 양준혁(41·삼성)이 올 시즌을 끝으로 선수 유니폼을 벗겠다는 결정을 26일 내렸다. "지난해부터 은퇴를 고심해 왔다"는 그의 말에서 힘든 결단이었음이 느껴진다. "팀 리빌딩을 위해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 팀에 보탬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다"는 게 스스로 밝힌 은퇴 이유다. 그는 "아직 체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후배들에 밀려 출전 기회가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아름다운 퇴장'을 결심하는 것이 팀뿐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도 나은 길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1993년 삼성에서 데뷔한 이후 18년 간 그라운드를 누볐던 그가 후배들을 위해 유니폼을 벗는다지만 그 어떤 후배도 그가 떠난 자리를 완벽하게 메우기는 힘들어 보인다. '기록의 사나이'라 불리는 그는 숱한 기록을 남긴 채 물러간다. 2131경기 출장, 7325타수, 2318안타, 351홈런, 1389타점, 1299득점, 3879루타, 4사구 1380개. 그가 은퇴를 선언한 26일 현재 갖고 있는 통산 기록들이다. 통산 타율은 0.316으로 장효조(0.331)에 이어 역대 2위.

그는 첫 해 타율 0.341, 23홈런, 90타점의 활약으로 수위 타자와 신인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2001년까지 9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하자 '방망이를 거꾸로 잡고 쳐도 3할을 칠 타자'라는 찬사가 따라붙었다. 장효조와 더불어 역대 최다인 4차례 수위 타자에 올라 '타격의 달인'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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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로서 웬만한 건 다 이루고 떠나는 양준혁. 그에게도 시련이라는 게 있었을까. 그의 야구 인생 첫 위기는 1998시즌이 끝난 뒤 들이닥쳤다. 데뷔 후 6년 간 빠짐없이 3할 타율을 기록한 그를 삼성이 트레이드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당시 해태의 임창용(야쿠르트) 한 명을 데려오기 위해 양준혁에 곽채진 황두성까지 얹어 성사시킨 3대 1 맞교환이었다. "내 몸엔 파란 피가 흐른다"며 "삼성의 푸른 유니폼을 벗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던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쫓기듯 옮겨 간 해태에서도 그는 3할을 쳤다. 선수협 설립에 관여하다 구단에 밉보여 다시 쫓겨나다시피 LG로 옮긴 뒤에도 2000, 2001시즌 3할 타율을 기록해 그를 쫓아내면 구단만 손해라는 걸 세상에 알렸다.

숱한 기록을 남기고 떠나지만 홈런왕과 정규 시즌 최우수선수와는 인연을 맺지 못한 것도 그에게는 아쉬운 부분이다. 그는 1997년(30개)과 1999년(32개), 2003년(33개) 3차례 30홈런 이상을 기록했지만 홈런왕에는 오르지 못했다. 23홈런을 친 1993년과 28홈런을 날린 1996년 두 차례 2위를 한 것이 최고 성적이다. 그는 지난해 5월 9일 두산전에서 통산 341호 홈런을 날려 한화 장종훈 코치가 갖고 있던 최다 기록을 넘어섰을 때 "홈런왕 타이틀 한 번 못 가져봤다. 하지만 오늘 홈런으로 홈런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됐다"며 좋아했다.

양준혁은 이날 1군 엔트리에서 빠졌다. 하지만 남은 시즌은 1군에서 생활하며 후배들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삼성은 9월 열리는 홈경기를 택해 양준혁의 은퇴 경기를 연다. 은퇴 후 진로는 시즌이 끝난 뒤 구단과 상의해 결정하기로 했다. "시원섭섭한 기분이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보내준 팬들에게 감사한다"며 양준혁은 짧지만 솔직한 소감을 남겼다.

한편 삼성 김응용 사장은 "양준혁(등번호 10번)은 오직 야구밖에 모르는 성실한 선수의 교과서다. 이만수(등번호 22번)의 기록보다 낫기 때문에 영구결번으로 지정될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석기자 w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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