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간 산재 인정 8명…유산은 여성만의 문제인가[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5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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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생의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갓 태어난 신생아의 손. 매년 수십만 명의 여성이 아기를 낳지만 그 3분의 1에 가까운 수가 유산이나 사산을 경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갓 태어난 신생아의 손. 매년 수십만 명의 여성이 아기를 낳지만 그 3분의 1에 가까운 수가 유산이나 사산을 경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지인 중에 매사에 에너지가 넘치고 일도 열심인 친구가 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직장에 다니지만 힘든 내색 한 번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주변에서 ‘철인’ 혹은 ‘에너자이저’와 같은 소리를 듣던 친구였는데, 얼마 전 그런 그가 유산을 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임신 초기 유산이었다. 업무가 바빠 집에 와서도 늦게까지 일에 매달렸고 일 걱정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데 아무래도 그게 원인이 됐던 거 같다고 했다.

“유산 휴가는 썼느냐”는 질문에 그는 “회사에 임신을 알리지 않았던 상태라 일반 병가를 써서 며칠 쉬었다”고 답했다. 유산이나 사산 때 임신 기간에 따라 최소 5일부터 최대 90일까지 유급 휴가를 낼 수 있다. 뒤늦게라도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고 유산 휴가를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도 회사 사람들은 그가 유산을 했던 사실을 모른다고 했다.

● 11년간 유산으로 산재 신청한 여성 19명
종종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아이 넷을 낳을 생각을 했느냐”고 물을 때가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무엇보다 건강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나는 임신과 출산을 비교적 남들보다 수월하게 한 편이었다. 만약 어느 하나라도 어렵고 고생스러웠다면 애초 다자녀를 낳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연도
출산 건수
유·사산 실인원수(단위: 명)
2017
35만2429
10만8542
2018
32만2691
10만6470
2019
29만9705
10만2236
2020
26만9705
9만5859
2021
25만7202
9만2200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임신과 출산은 수월한 일이 아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1년에만 9만2200건의 유산 혹은 사산이 일어났다고 한다. 같은 해 출생 건수가 25만 건임을 감안하면 그 해 임신 서너 건 중 한 건은 유산 혹은 사산이었던 셈이다. 그 해만 그랬던 게 아니다. 최근 5년간 통계를 봐도 유·사산 건수는 같은 해 출생 건수의 약 3분의 1로 비율이 비슷했다.

서울의 한 산부인과 앞에서 진료를 받으러 온 여성이 임신부가 그려진 플래카드 앞을 지나고 있다. 뉴스1
서울의 한 산부인과 앞에서 진료를 받으러 온 여성이 임신부가 그려진 플래카드 앞을 지나고 있다. 뉴스1


그러나 주변에서 유산을 했다거나 유산 휴가를 썼다는 여성을 그만큼 쉽게 볼 수 있느냐고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아마도 대부분 내 지인처럼 유산 사실을 쉬쉬하기 때문일 것이다.

취재 때문에 이런 저런 자료를 찾다가 지난해 여성 근로자의 산업재해 보상 신청과 관련해 정부가 실시한 정책연구를 보게 됐는데, 거기 나온 수치에서도 그런 경향이 드러났다. 2010년에서 2021년까지 유산, 사산, 조산으로 산재 관련 급여를 신청한 여성 근로자를 살펴 보니 11년간 산재 보상을 신청한 여성은 모두 합쳐 단 19명에 불과했다. 한국의 15세 이상 여성 고용률은 50% 이상, 서른 살 전후 젊은 여성의 고용률은 70%에 육박한다. 한 해 동안 발생하는 10만 건에 가까운 유산 혹은 사산 중 많은 수가 일하는 여성에게서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산재 보상을 신청한 여성은 연간 한두 명뿐이라는 이야기였다.

반면 일반적인 산업재해 현황에서 업무상 질병에 대한 보상 신청 건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2020년 기준 업무상 질병으로 산재를 인정받고 요양한 사람만 1만4000명을 넘었다. 보통 취업한 여성의 유산율이 미취업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상황까지 감안하면 유산, 사산, 조산의 산재 신청인수는 적어도 너무 적었다.

유산·사산·조산 산재 신청 및 승인 현황표



2010~2017
2018
2019
2020
2021
합계
산재 신청
12
1
3
2
1
19
산재 승인
4
0
2
1
1
8

●‘유산=여성 개인의 문제’…관심·연구 부족
산재 신청도 적었지만, 그 중 산재를 인정 받은 사람은 더 적었다. 19명 가운데 단 8명만 최종적으로 산재 인정을 받았다. 1년에 한 명도 채 안되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막상 인정, 불인정 사례를 비교해보니 내용이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산재가 인정된 방과후아카데미 지도사의 경우 30도 이상의 고온에서 야외활동을 한 것이 유산의 주된 사유로 인정되었는데, 산재를 신청한 또 다른 음식점 여성 종사자는 고온의 환경에서 장시간 조리를 했지만 그보다는 태아의 이상이 유산의 주요인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산재를 인정받지 못했다. 산재를 신청한 간호사들도 대부분 장시간 근로, 야근, 주변인들과의 마찰 등 유산 위험요인이 비슷했지만 누군가는 산재 인정을 받았고 누군가는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를 한 연구진은 이처럼 동일한 유해 요인, 동일한 직종에 대해 다른 판정이 나온 이유가 국내에 유산에 대한 의학적 연구나 산재 인정 전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쉽게 말해 유산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부가 아직 부족해 제한적 지식 안에서 판단하다 보니 상황에 따라 들쑥날쑥한 판정이 이뤄졌다는 말이다.

유산에 대한 관심과 공부가 부족한 데는 유산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산은 여러 생물학적,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의학적 문제다. 하지만 이를 일반적인 의학적 문제로 보기보다 ‘여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유산이 발생하면 그 원인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그저 불행한 일이 발생한 것처럼 쉬쉬하기에 바쁘다. 내 지인처럼 말이다.

물론 유산과 근무환경의 인과관계를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느 질병이나 마찬가지다. 유산과 근무환경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가 부족하긴 해도 우리 직업환경의학 역시 장시간 근로, 고정 야간 근무, 심한 육체노동과 정신적 스트레스, 트라우마는 조산 등과 연관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직장 내 모성 보호 지침이 비교적 잘 정비돼있는 유럽과 북미에서는 유산에 영향을 미치는 물리, 화학적 환경에 대해 구체적 산재 인정 기준까지 마련해놓는 등 유산에 미치는 근무환경 요인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초음파 기계로 본 복중 태아의 모습. 동아일보DB
초음파 기계로 본 복중 태아의 모습. 동아일보DB

● 유산은 가족·사회 모두의 문제
유산의 원인을 찾고 그 아픔을 보듬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유산이 비단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를 잃은 엄마가 있다는 건 아이를 잃은 아빠도 있다는 뜻이다.누군가는 소중한 손자를, 하나뿐인 동생을 잃었을 것이다. 유산은 남녀노소 모두의 문제다.

사회의 재생산성 측면에서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저출산 예산으로 한해 40조 원 넘는 돈을 쓰지만 아이를 낳겠다는 사람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도 좋지만, ‘아이를 낳겠다’는 사람을 안전하게 출산까지 이를 수 있게 돕는 편이 더 쉽지 않을까. 전체 출산 건수의 3분의 1에 달하는 유산 건수를 줄인다면 출생아 수가 소폭이나마 반등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여성 근로자의 모성보호를 위한 제도는 꾸준히 발전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비슷한 비율의 유산이 계속 발생하고 있고, 그에 대한 문제 제기가 적다는 것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시사한다. 만혼, 노산이 늘면서 ‘습관성 유산’을 겪는 여성들도 늘어나는 등 새로운 위험요인도 커지고 있어 전체 출산 중 유산의 비율이 올라갈 가능성도 적지 않다. 유산을 더이상 개인의 문제, 아픔으로만 여기지 말고 발생 원인과 방지 대책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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