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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꿀벌처럼 정착하는 국군포로 아들 부부[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주성하기자 |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입력 2022-11-20 09:00업데이트 2022-11-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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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봉업을 시작하기 위해 충북 괴산군 청안면에 정착한 탈북민 김정룡·이애정 부부

2014년 3월, 충북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 이장의 집에 억양이 색다른 남녀가 나타나 문을 두드렸다.

“이장님. 저희는 북한에서 온 탈북민인데 이곳에 정착하고 싶습니다. 빈집을 찾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한국에서 평생 산 사람도 자리 잡기 힘든 귀농생활인데, 북에서 온지 1년 남짓 된 부부가 그것도 이 씨 집성촌을 찾아와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북한에서 온 사람은 처음 본 이장은 신기한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보고 이들이 딱해 보여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장은 이들을 데리고 면사무소로 가서 빈집 하나를 소개해주었다.

말이 빈집이지 사실상 오랫동안 방치됐던 폐가로 곳곳에 쥐구멍이 뚫려 있었다. 첫날 저녁 탈북민 부부는 천정에 뻥 뚫린 구멍으로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잠을 청했다. 신발이 닳을 때까지 충북 지역을 헤매던 이들에게 그나마 집이라고 들어와 누울 곳이 생긴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 때문에 놀란 쥐들이 사방에서 찍찍 울어댔다. 쉽게 잠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이들은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온 것일까.

크게보기꿀을 채취하는 김정룡 씨.
# 남편 이야기

남편 김정룡 씨는 1968년 함경북도 회령시 세천동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점점 크면서 자신의 운명이 태어날 때부터 꼬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학창 시절 학급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늘 들어갈 정도로 공부도 잘했지만 남들이 다 하는 학생 간부 자리 하나 맡지 못했다. 중학교 졸업하기 전에야 그는 자신이 대학에 절대 갈 수 없으며, 탄광에서도 가장 힘든 굴진공으로 평생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국군포로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김석만 상사는 1923년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태어났다. 1950년 전쟁이 터지자 그는 군에 입대해 미군 카투사로 장진호반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부대를 재정리하면서 수도사단에 들어간 뒤 3년 내내 전투를 벌이다가 종전되기 불과 열흘 전인 1953년 7월 16일 금성전투에서 몇 배의 압도적 병력으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다.

수도사단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이 포로가 되고, 육근수 기갑연대장이 전사하는 등 치열했던 이 전투에서 한국군 1701명이 전사하고, 7548명이 부상을 입었고, 20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임 대령은 휴전 한 달 뒤에 귀환했지만, 대다수 포로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포로가 될 당시 부소대장이었던 김석만 상사는 악질 반동이란 이유로 1956년까지 포로수용소에서 살다가 가장 북쪽인 함경북도의 탄광으로 끌려갔다.

북한은 국군 포로들을 아오지탄광은 물론이고, 인근 온성탄광, 회령 세천탄광 등에 분산 배치해 노동력을 보충했다. 포로 출신들은 탄광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일했다. 김석만 상사도 아들 김정룡이 7살 때인 1975년에 붕괴사고로 다리를 다쳐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다.

포로 출신이지만, 6.25전쟁으로 북한 지역에서도 많은 남자들이 전사한 바람에 장가는 갈 수 있었다. 김석만 상사도 회령에서 어린 딸을 키우는 여인과 만나 결혼했다. 그녀의 전 남편은 6.25전쟁 때 인민군으로 나가 전사했다. 결혼 이후 이들 사이엔 아들 셋이 태어났는데 김성룡 씨는 막내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1994년 세상을 떠났다. 사망하기 1년 전 그는 죽음을 예감한 듯 막내아들을 불러 밤마다 산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과 남쪽에 사는 형제자매들의 이름과 나이를 자세히 이야기해주면서 “너는 꼭 아버지의 고향에 가라”고 당부했다.

1984년 중학교를 졸업한 김 씨는 정해진 운명대로 아버지가 일하는 탄광의 굴진공으로 배치가 됐다. 탄광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그는 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리고 3년 뒤 막대한 뇌물을 시 병원 부원장에게 주고 정신병 감정서를 받았다. 평생 정신병자로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아버지의 삶을 물려받기는 싫었다.

그는 회령을 벗어나 도 소재지인 청진으로 나갔다. 이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장사 밖에 없었다. 그는 내재된 장사 수완을 마음껏 발휘했다. 중국에 있는 이모와 연결해 닥치는 대로 장사를 하다가 나중에 중고 자전거를 거래했다. 북한에서 자전거는 한국으로 치면 자동차만큼 필수적이면서도 중요한 재산이다. 나중에 그는 일본에서 중고 자전거를 1000대씩 들여와 바지 사장을 내세워 파는 큰 손이 됐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집에 돈이 넘쳐났다.

돈이 많아 여기저기 뇌물을 뿌리니 정신병 감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미가 없어졌고, 장사 연한이 늘어나면서 청진 수남시장에서 알아주는 큰 손이 됐다. 중국으로 넘나들 수 있는 증명서를 발급받아 수십 번이나 중국을 제 집처럼 다녀오기도 했다. 결혼도 해서 1992년 아들을 얻었지만, 불행하게도 아내는 2003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좋은 집에서 돈을 마음대로 쓰고 살던 그는 2009년 말 급작스럽게 단행된 화폐개혁 후 위기를 맞게 됐다. 그의 집에서 북한돈 최고액권인 5000원이 가득 든 마대들이 발견된 것이다. 그는 보위부에 수감돼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벌게 됐는지 3개월이나 조사를 받았다.

국군포로 아들인 그를 보위부는 안기부에서 돈을 받은 간첩으로 엮으려 했다. 게다가 맏형은 2003년 안전부장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붓다가 정부를 모욕했다는 죄명으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그러니 보위부에서 판단하건대 그는 반동이 될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

하지만 김 씨는 3개월 동안 끝내 돈의 출처를 다 해명해냈다. 그러고도 당시 집 열 채는 살 수 있는 돈인 5000달러를 더 뇌물로 쓴 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평생 모은 돈이 화폐개혁으로 사라지고, 보위부에 뇌물로 다시 시작할 밑천까지 빼앗기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밀려왔다.

“이 땅에서 아등바등 살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자.”
2012년 5월 그는 20세가 된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탈북해 이모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한국 국방부에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의 이름과 군번을 말하자 국방부에서 신속하게 움직여 여권을 발행해 주었다. 그는 탈북한지 25일 만에 인천공항에 내렸다.

조사를 받은 뒤 현충원을 찾아갔다. 그곳엔 무공훈장 수여자인 아버지의 묘비가 전사자 묘역에 있었다. 정착한 지 몇 년 동안은 북한에서 아버지 유해라도 수습해 오려 했지만, 북한에서 국군포로는 묘까지 철저히 감시하고 있는 바람에 포기했다.

아버지 형제들도 찾아봤지만 이미 다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사촌들은 있지만 전혀 모르는 상태로 평생 지내다가 갑자기 혈육이라고 어울리기는 어려웠다.

하나원 기간 어디에 정착해 살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탈북민들에겐 서울이 가장 인기가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번잡한 곳이 싫었다.

시골로 가겠다고 하자, 충북 청주에 있는 임대주택을 배정해주었다. 44세에 전혀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 입국해서부터 하나원 생활을 하는 기간 그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는 “앞으로 사회에 나가면 장가가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다, 아들까지 키우는 탈북남성과 누가 결혼하겠는가는 말이 그럴 듯하게 납득이 됐다.

“평생 혼자 살면 되지”라고 생각하며 생소한 곳에서 몇 달쯤 살았는데, 탈북민 현지 정착을 도와주는 하나센터를 다니다가 그곳에서 역시 입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탈북 여인을 알게 됐다. 몇 번 만나보니 여성도 그리 싫은 내색이 아니었다.

“나랑 살아주면 무조건 감사한 일이지.”

2012년 12월 둘은 한국에서의 새 삶을 함께 힘을 합쳐 이겨내자고 합의를 보았다.

크게보기지난달 남북하나재단이 주최한 행사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다양한 꿀 상품을 소개하는 이애정 씨.
# 아내 이야기

한국에 와서 김정룡 씨와 하나센터에서 알게 된 이애정 씨는 두 사람이 만나기 3개월 전인 2012년 9월 충북 청주에 정착했다.

누군가가 “저 사람도 혼자 살고, 당신도 혼자니까 합치면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 그의 첫 물음은 “저 사람 직행입니까”였다. 직행은 중국 생활을 거치지 않고, 북한에서 탈북해 곧장 한국으로 온 사람을 가리키는 탈북 사회의 은어다. 직행이라는 대답을 듣자 그는 “싫다”고 대답했다.

“중국에서 몇 년 살았으면 ‘중국물’을 먹어 좀 눈치라도 생기지만, 북한에서 바로 오면 ‘북한물’이 빠지지 않아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나센터를 다니며 곁눈질해보니 의외로 남자가 듬직하고 믿음이 갔다. 점점 이 사람하고는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국군포로 가족이란 이유로 북한에서 차별을 받았던 김 씨와 달리 이 씨는 북한군 특수부대인 항공육전대(한국의 특전사격) 출신의 노동당원이었다.

1967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1983년 군에 자원입대했다. 그가 소속된 부대는 평양 미림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항공육전대였는데, 그는 무전수 보직을 맡았다. 북한에서 ‘안둘’이라고 부르는 An-2를 타고 낙하훈련도 많이 했다. 그런데 4년 뒤 부대가 갑자기 해산돼 이후 개천비행장에 옮겨가 위생지도원 직책을 맡았다. 거기서 노동당에 입당한 뒤 7년 복무 만기를 채우고 1990년 제대했다.

특수부대 출신으로 노동당원인 그를 당국은 고향에 있는 혁명전적지인 ‘왕재산기념탑’ 호위 고사총소대 소대장으로 임명하려 했다. 하지만 또 군 복무를 하긴 싫었다. 그는 아버지가 일하는 온성 탄광으로 자원했다. 집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제대돼 고향으로 돌아온 첫날 그는 눈물을 흘렸다. 7년 동안 눈에 띄게 늙은 아버지가 딸을 만나자 마자 “배급이 두 달 어치가 밀려 밥도 해줄 형편이 못 된다”며 눈길을 피했다.

가마를 열었더니 풀을 가득 삶고 있었다. 산에서 풀을 뜯어와 독을 빼고 있었던 것이다. 남쪽에선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1995년부터 시작됐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함경북도는 1990년부터 배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저녁에 밖에 나가보니 건너편 중국 땅이 불야성이었고, 도로엔 차들이 가득했다. 7년 전 입대할 때엔 초가집들이 보였는데, 이젠 모두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중국은 몰라보게 변했는데, 북한은 반대로 깜깜해졌고 배급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변한 건 중국 밖에 없구나.”

그는 탄광에 정착했다. 제대된 이듬해 탄광 노동자와 결혼도 하고 딸도 낳았다.

그러다가 배급이 아예 사라진 ‘고난의 행군’을 겪게 됐다. 그는 장사에 뛰어들었다. 애를 업고 수 백리 떨어진 나진에 가서 생선을 사다 온성에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보안원들이 수시로 장사가 불법이라며 생선을 빼앗아갔다.

“배급도 안주면서 장사도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하냐”고 항의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혼 5년째인 1996년 남편이 폐병으로 사망했다.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석탄분진이 가득한 탄광에서 일하다보니 그렇게 죽는 사람이 주변에 많았다.

세상 살기가 막막하던 때에 갑자기 김정일 방침이란 것이 떨어졌다. 저격·경보병 등 특수부대에서 복무했던 사람을 재입대시키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군 복무 자원이 부족해지자 1997년 10년이던 군 복무 기간을 13년으로 늘였다. 그것도 모자라 특수부대 출신까지 다시 입대시켜 병력자원으로 삼았다.

이 씨는 1997년 한국의 부사관격인 초기복무 사관으로 재입대했다. 당시 탈북자가 많아지자 국경경비대 인원을 급격히 늘렸는데, 그 바람에 그는 한국 온성 주둔 국경경비대 남양경비대 인사담당 사관으로 발령받았다. 그가 입대하자 평양에 살던 남편의 여동생이 딸은 자기들이 키운다며 데려갔다.

국경경비대에 근무하게 되자 고향 사람들이 찾아왔다. 밀수를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들도 아닌지라 어쩔 수 없이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검열에 걸렸다. 군인 신분으로 체포되면 군법으로 처벌을 받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군복을 입은 채로 두만강을 넘었다. 그때가 1999년이었다.

무작정 강을 넘어 흑룡강성까지 깊이 들어갔지만, 언제 잡혀 북송될지 모르는 처지였다. 당시는 한국으로 오는 길도 없던 때였다. 그는 농촌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한족을 만나 주저앉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에서 남편에게 ‘꼬리빵즈(중국 사람이 한국인을 경멸하여 이르는 말) 등의 각종 욕설과 무시를 당했지만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이 흘러 중국말도 유창하게 하게 되자 그는 길림으로 옮겨 유치원 교사로 취직했다. 당시는 현지에서 한국으로 가는 바람이 불어 한국말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의 몸값이 높았다. 1500위안이라는 꽤 높은 월급을 받았지만, 중국 국적이 없어 항상 불안했다.

2009년 청도로 다시 옮겨가 현지에서 소머리국밥 식당을 차렸다. 식당은 잘 됐지만, 식사하러 오던 한족 공안 중 한 명이 사장의 말투가 수상하다며 자주 찾아왔다. 수천 위안의 뇌물을 주고 입을 막으며 버텼지만 그 공안이 다른 곳으로 가면서 더는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식당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떠났다.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입국했고, 2012년 9월 충북 청주에 정착했다.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중국에서 식당일을 했던 경험을 살려 식당 직원으로 들어갔다. 혼자서 주방일과 홀서빙까지 척척 다 하자 일당 5만 원이 금방 9만 원으로 늘었다. 그러던 중 하나센터에서 김 씨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남편은 한국 사회에 쉽게 정착을 잘 하지 못했다. 건설장에 나가 일을 하다가도 며칠 안돼 일을 때려치우고 들어올 때가 많았다. 물어보니 “어린 외국인들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려니 자존심이 너무 상한다”는 이유였다. 북한에서 돈 많은 상인으로 사람들을 부리며 살다가 한국에 와서 기술이 없다고 무시당하니 견디기 어려워한 것이다.

어느 날 둘이 마트에 쇼핑하러 갔는데, 남편이 설탕 가격과 꿀 가격을 비교하며 “양봉을 하면 돈을 벌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니 “내가 북에 살 때 취미생활로 집 앞에서 꿀벌을 많이 키워봤다”고 했다.

그날 저녁 부부는 인터넷으로 ‘양봉’을 검색해봤다. 그리고 인근 괴산에 아카시아 나무가 많아 꿀을 생산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괴산으로 가서 이곳저곳 현장 답사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발품을 팔고 정한 곳이 조천리였고, 이장을 찾아가 사정한 끝에 빈집을 구했다.

크게보기2019년 북한이탈주민 생산품 특별전시회에 자신들의 꿀을 가지고 참가한 김정룡·이애정 부부.
# 괴산에 온 탈북 부부

2014년 봄 충북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에 정착한 부부는 우선 폐가부터 수리했다. 천정을 수리하고 쥐구멍을 메우고 열심히 손을 보니 그런대로 살만했다.

청안면에 처음 온 탈북민이라고 마을 어르신들과 부녀회장 등이 우르르 몰려와 “오느라 고생했다. 여기서 잘 정착하라”고 독려해줄 땐 울컥 눈물이 났다.

양봉을 시작하려면 벌을 사야했다. 당시 벌 한 통은 15만 원이었는데, 양봉을 하려면 최소한 100통은 필요했다. 둘은 각자의 임대아파트를 내놓고 임대 보증금을 찾아 2500만 원을 만들었다.

이 씨는 “살면서 처음 더운물이 콸콸 나오고, 온수난방이 되는 아파트에서 살게 돼 너무 행복했는데, 그걸 내놓을 땐 너무 눈물이 났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만든 돈으로 벌을 구입했고, 비싼 꿀통도 샀다. 그런데 처음 산 벌은 속아서 샀다. 한 통에 벌이 몇 마리 정도 있는지 잘 보고 사야 하는데, 경험이 없다보니 마리수가 턱없이 적은 벌통을 산 것이다. 벌통에 1만 마리 정도의 벌이 없으면 세력이 약해 구실을 하지 못한다. 결국 100통을 사서 ‘합봉’을 하니 50통이 됐다.

분쟁도 벌어졌다. 어느 날 어떤 남자가 찾아와 “내가 근처에서 먼저 몇 년 동안 하고 있는데 당신들이 여기다 벌이면 안 된다”고 했다. 이때는 면장이 도와주었다.

“타 지역에 사는 당신은 여기서 오래 벌었는데, 저 사람들은 이곳에 주소지를 갖고 있고, 또 북에서 와서 처음 시작하는데 좀 도와주라”고 중재하니 남자가 양보해 주었다.

그럭저럭 첫해에 아카시아 꿀을 330㎏짜리 다섯 드럼통을 생산했다. 그런데 이번엔 판로가 없었다. 당시 아카시아꿀은 2.4㎏짜리 병으로 도매가 2만5000원, 소매가가 4~5만 원 정도 했다. 전량 도매로 넘겨도 170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본전도 나오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도매도 넘길 곳도 없었다.

이들은 무작정 꿀을 싣고 근처를 돌았다. 손수레에 명함과 전단지를 붙인 꿀병을 싣고 지역 노인회관들은 물론 청주에 있는 병원 입원실이란 입원실은 다 돌았다. 파는 것보다 공짜로 나가는 것이 더 많았다. 초기 2년은 그렇게 홍보를 하느라 남는 것이 전혀 없었다.

벌 농사가 적자이니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부부는 꿀을 치지 않는 겨울엔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나마 농촌에 사니 나가는 돈이 적었다.
첫해 꿀을 치면서 김정룡 씨는 북한에서 취미로 양봉을 했던 경험은 남쪽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부는 현지 양봉협회에 가입했고 이듬해 함께 괴산에서 마침 시작된 양봉교육 1년 과정에 입학해 졸업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좋은 인연도 많이 만났다.

특히 이웃 증평에서 ‘다인양봉원’을 하고 있는 박영주·김다인 부부는 이들에게 벌을 키우는 노하우를 많이 가르쳐주었다. 수십 년의 양봉 경력을 가진 전문가들인 이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해주었다.

제대로 양봉 공부를 하니 매출도 늘어났다. 2016년엔 일곱 드럼통을 생산했고, 모두 도소매로 처분할 수 있었다. 이애정 씨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2016년 남북하나재단이 주최한 새터민 정착사례 발표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는 영예도 얻었다. 좋은 벌을 구분하는 눈도 길렀고, 기술도 늘어났고, 벌통도 더 많이 사서 확장하니 신바람이 나고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 마음의 부자

2017년 9월 양봉장에 올라오던 부부는 강한 농약 냄새를 맡았다. 불길한 예감에 허둥지둥 올라와보니 벌통 주변에 새하얗게 죽어 깔린 벌들 사체가 깔려있었다.

알고 보니 양봉장 근처에서 약 10평 정도의 밭에 옥수수를 심었던 마을 할머니가 살충제를 친 것이었다. 살충제의 독성은 벌들에겐 치명적이었다.

원래 이들이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지대가 높은 곳이었는데, 아래쪽에서 인삼 농사를 짓던 현지 주민이 텃세를 부리며 길을 막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아래쪽에 벌통을 옮겨왔다가 밭이 가까워져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부부는 땅에 주저앉았다.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국 땅에 와서 5년 동안 옷도 거의 사 입지 않고, 어디 놀려도 가지 못했다. 1년에 식비를 200~300만 원 정도만 쓰며 죽어라 벌어 유일하게 남긴 것이 꿀벌인데, 대다수가 죽어버린 것이다. 앞이 막막했다.

부부는 그해에 벌 270통을 키웠는데 살충제 사고로 10통도 채 건지지 못했다. 이때엔 꿀벌 가격도 비싸져서 한 통에 30만 원으로 올랐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충격으로 쓰러져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충격을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렇지만 부부는 다시 일어났다.

“주저앉아 있어봐야 방법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벌자. 우리는 농촌에 살아서 주변에 먹을 것도 쉽게 구할 수 있지 않나. 기술도 이미 익혔으니 처음보단 낫지 않나. 다시 시작하자.”

부부는 서로를 격려하며 다시 꿀통 50개를 샀다. 이들은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여건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조천리에 양봉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서 경쟁도 심해졌다.

이들은 새로운 자리를 물색하기 위해 괴산군을 다시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골짜기란 골짜기는 다 들어가서 양봉을 하는 사람이 없고 꽃이 많이 곳을 찾았다. 그러다가 2020년 굴정면 지장리 깊은 산골에서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도로에 가까우면 꿀에 매연냄새가 배이지만, 깊은 골짜기에서 생산하면 높은 품질을 보장할 수 있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마을 이장을 비롯한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이들은 새로운 장소에서 양봉을 시작했다.

지난해엔 이상기후로 전국적으로 벌이 많이 죽어 꿀을 많이 생산하지 못했지만, 올해는 3000만 원을 벌었다. 이들은 당분간 번 돈은 무조건 다시 재투자할 계획이다.

부부는 자신들이 생산한 꿀에 ‘백세양반꿀’이라는 브랜드를 붙였다. 꿀만 팔지 않고 이를 활용해 로얄젤리나 꿀스틱 등을 생산해 팔고 있는데, 나름 잘 팔리고 있다고 한다.

부부가 양봉에 뛰어든 지 어느덧 8년차가 됐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이들은 양봉업계에서 알아주는 베테랑이 됐을 뿐 아니라 그동안 배운 노하우를 남에게도 전수하고 있다.

탈북민 중에서 양봉업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자신들의 양봉장으로 불러 기술도 전수해주고 한국 농촌에 정착하는데 필요한 교훈도 가르쳐준다.

“어느 마을에 가도 우린 젊은 사람이다. 솔선수범해 마을 일에 나서고, 어르신들에게 잘하다보면 원주민들도 마음을 연다. 또 시행착오는 순간일 뿐이니 그걸 넘다보면 정착에 성공한다.”

벌써 5~6명의 탈북민이 김정룡 부부의 양봉장에서 기술을 배웠고, 이중 2명이 경북 문경과 충북 청주에서 성공적으로 양봉업계에 정착했다.

이들은 자신이 생산한 꿀 중 일부를 어린이재단이나 요양원에 후원하기도 한다.
부부가 열심히 살면서 벌과 씨름하는 사이 자녀들도 씩씩하게 잘 자랐다. 김정룡 씨가 북에서 데리고 온 아들은 올해 30살이 됐는데, 타일기술을 배워 스스로 자수성가하고 있다. 이애정 씨가 2006년 중국에서 낳아 데리고 온 딸도 탈북민 대안학교에 잘 정착해서 공부도 열심히 하며 지내고 있다.

김정룡 씨는 북에서 그동안 둘째형 가족과 첫째 형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 이들도 다 한국의 어엿한 국민으로 자기 몫을 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김 씨는 자신이 무인도에 떨어진 로빈손 크루소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평생 살아갈 밑천과 지인들을 얻어 만족할만한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은 누구보다 통일이 되길 기원한다. 한국은 점점 드론으로 농약을 치는 지역이 늘어나고 온난화 영향까지 받아 벌을 키우기가 어려워지는데, 환경오염이 덜한 북한에 가면 훨씬 훌륭한 꿀을 생산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때까지 한국에서 양봉업을 키워 자신의 농업법인을 만드는 것이 부부의 목표이다.

“이제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너무 큰 것은 바라지 않고, 우리가 소박하게나마 평생 일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한국 정착 10년 만에 부부는 더 이상 부러운 것이 없는 마음의 부자로 우뚝 섰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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