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차오르는 병실, 간호사는 끝까지 환자 지켰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8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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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병원 건물 화재, 환자-간호사 등 5명 사망
아래층 골프연습장 철거중 불꽃
“고령 투석환자 많아 인명피해 커”

5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경기 이천시 관고동 학산빌딩에서 소방대원들이 사다리차를 동원해 창문을 깨고 시민들을 구조하고 있다. 이날 화재로 4층 병원에서 환자 4명과 간호사 1명이 사망했고 42명이 부상했다. KBS 화면 캡처
5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경기 이천시 관고동 학산빌딩에서 소방대원들이 사다리차를 동원해 창문을 깨고 시민들을 구조하고 있다. 이날 화재로 4층 병원에서 환자 4명과 간호사 1명이 사망했고 42명이 부상했다. KBS 화면 캡처
경기 이천시 상가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환자와 간호사 등 5명이 숨지고 42명이 다쳤다.

경기소방재난본부 등에 따르면 5일 오전 10시 17분경 이천 관고동 학산빌딩 3층 스크린골프연습장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소방당국은 관할 소방서 전체 인력이 출동하는 대응 1단계를 발령하고 소방차 40대를 투입해 오전 10시 55분 큰불을 잡았다. 그러나 4층에서 신장투석을 하고 있던 60∼80대 환자 4명과 환자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남았던 간호사 현은경 씨(50) 등 5명이 연기를 흡입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했다. 4명은 중상을, 38명은 경상을 입었다.

경찰은 3층 골프연습장에서 철거작업을 하던 중 천장에서 불꽃이 튀면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전담수사팀을 꾸려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소방 관계자는 “투석 중이던 고령 환자가 많아 인명 피해가 컸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구조된 분들에 대한 의료 조치에 만전을 기하라”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이천 병원 건물 화재 5명 사망
20년 베테랑 故현은경 간호사… 환자 돌보는 모습 CCTV에 찍혀
동료들 “충분히 피할수도 있었는데”, 유족 “부친 팔순 하루 앞두고…”
3층 화재 연기, 위층 투석환자 덮쳐… 시커먼 연기속 질식 등 47명 사상
화재 당시 소방설비는 정상 작동… 입원시설 없어 스프링클러 미설치


5일 경기 이천의 한 병원에서 사망한 간호사 현은경 씨(가운데 아래)가 가족들과 찍은 사진. 지난달 
전남 구례에서 군복무 중인 아들 장호현 씨(오른쪽)의 면회를 갔다가 함께 찍었다고 했다. 왼쪽은 딸 장지현 씨, 현 씨 위는 남편
 장재호 씨다. 장재호 씨 제공
5일 경기 이천의 한 병원에서 사망한 간호사 현은경 씨(가운데 아래)가 가족들과 찍은 사진. 지난달 전남 구례에서 군복무 중인 아들 장호현 씨(오른쪽)의 면회를 갔다가 함께 찍었다고 했다. 왼쪽은 딸 장지현 씨, 현 씨 위는 남편 장재호 씨다. 장재호 씨 제공
“연기가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환자를 두고 나가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보고 싶습니다.”

5일 오전 경기 이천시 관고동 학산빌딩 화재로 사망한 간호사 현은경 씨(50)의 아들 장호현 씨(21)는 어머니의 시신이 안치된 경기도의료원 이천병원을 찾아 연신 울먹였다.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왔다는 장 씨는 “소방당국으로부터 환자들을 먼저 대피시키느라 대피가 늦었을 것이란 얘길 들었다. 평소 옳다고 생각한 일을 끝까지 지키는 신념 때문인 것 같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 연기 올라와도 마지막까지 환자 지켰다
20여 년간 환자를 돌본 베테랑 간호사 현 씨는 이날 4층이 연기로 뒤덮이자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신장 투석환자들을 먼저 대피시켰다. 현 씨에겐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지만 환자들을 위해 남았고 결국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현 씨가 연기가 올라오는 와중에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를 돌보는 모습은 화재 당시 상황을 촬영한 4층 병원 폐쇄회로(CC)TV에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료 간호사 A 씨는 “본인이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환자들을 돕다 늦어져 대피를 못 한 것 같다”며 슬퍼했다.

현 씨는 이날 퇴근 후 아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었다고 한다. 특히 현 씨의 아버지가 6일 팔순이어서 가족 모임도 예정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날 빈소에서 현 씨의 남편 장재호 씨(53)는 애써 슬픔을 억누른 채 “괜찮다”며 오히려 조문객들을 위로하는 모습이었다. 장 씨는 “장인어른의 팔순을 앞두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며 한참 허공을 쳐다보다 결국 눈물을 흘렸다.
○ 건물 3, 4층 스프링클러 미설치

5명이 숨지고 42명이 다친 이번 화재는 고령의 환자들이 병원에서 신장투석 치료를 받던 중 신속하게 대피하지 못해 인명 피해가 커졌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최초 발화는 이날 오전 10시 17분경 3층 스크린골프연습장 1번방에서 발생했다. 작업자 3명이 철거 공사를 하던 중 천장 부근 전선 등에서 불꽃이 튀는 걸 보고 진화에 나섰으나 불길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불길은 순식간에 건물 내장재 등을 태우며 번졌고 연기는 배관과 통로 등을 타고 4층까지 퍼졌다.

이때 4층 투석전문 병원에선 환자 33명이 치료를 받거나 대기 중이었다. 소방당국은 대응 1단계를 발령하고 소방차 40대를 투입해 38분 만에 큰 불길을 잡았다. 병원 직원과 환자 등 47명은 연기를 흡입하거나 부상을 당한 상태로 구조됐는데, 그중 60∼80대 환자 4명과 현 씨가 사망했다. 치료를 받다가 대피한 권모 씨(67)는 “연기가 치료실 안까지 무섭게 차올랐다”며 “환자 대부분이 고령에 거동도 불편해 대피하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고 했다.

불이 난 이 건물은 중앙 엘리베이터를 기준으로 우측과 좌측으로 나뉘는데, 연기는 화재가 발생한 3층 스크린골프장 쪽인 우측에 집중됐다. 사상자가 다수 발생한 신장투석실 역시 건물 우측에 있었다.

이천소방서에 따르면 건물 소방 설비는 정상 작동했다. 그러나 불이 발생한 3층과 연기가 퍼진 4층은 스프링클러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소방청 관계자는 “이 병원은 입원시설이 없다 보니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 대상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이천=이경진 기자 lkj@donga.com
이천=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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