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이성윤 “흑을 백으로 바꾸는 지휘 없었다”…비공개 이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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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년 6월 10일 16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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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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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단행된 검사장급 인사에서 피고인 신분임에도 서울고검장으로 영전한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이 “사건 처리 과정에서 ‘흑을 백으로, 백을 흑’으로 바꾸는 지휘는 결단코 하지 않았다는 점만은 자부한다”는 이임사를 남겼다. 2018년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한 기소를 지연한 의혹, 옵티머스 사건 축소 배당 논란 등 주요 정권 사정 길목에서 ‘정권의 소방수’를 자처했다는 소속 검사들의 비난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 이성윤 “흔들리는 배 중심잡아” vs 검사들 “정권 의중에 맞춰 중심 잡았나”
11일 서울고검장으로 영전하는 이 지검장은 이날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비공개 이임식을 열어 “여러분 저로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았으면 용서를 구한다. 여러분께 받은 은혜 잊지않겠다”는 짤막한 이임사를 남겼다. 국내 최대 검찰청인 서울중앙지검 수장의 이임식이 비공개로 열린 사례는 극히 이례적이다. 검사들 사이에서는 “정권 방탄 검사장이라는 논란에 따라 언론 등 외부 인사의 눈을 피한 것 아니냐”는 시선이 나왔다.

이 지검장은 대신 서울중앙지검 검사들에게 A4 용지 2장 분량의 e메일을 통해 주요 논란에 대해 소명했다. 그는 ‘감사 인사’라는 글에서 “중앙지검장으로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을 돌아보면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배의 중심을 잡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저는 검찰의 일부 잘못된 수사방식과 관행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어, 기본과 원칙, 상식에 맞는 절제된 수사를 하여야 한다고 평소 생각해왔다”며 “수사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단계 단계마다 최대한 수긍할 수 있는 절차를 보장하고, 그에 따라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인 결론을 내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자평했다.

이에 일선 검사들 사이에서는 “이 지검장 재임 이후 제대로 된 부패 사정 수사로 꼽을 수 있는게 무엇이 있느냐”는 반응이 우세하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흔들리는 배의 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간 게 아니라 정권의 방향과 의중만 바라본 것 아니냐”고 했다.

● 이성윤, “김학의 불법 출금 기소 사과”
이 지검장은 대검 반부패강력부장 근무 당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불법 출국금지 사건에 대한 2019년 안양지청 수사를 무마한 혐의로 기소된 점에 대해선 “기소가 되어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검찰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검찰이 처한 안타까운 현실로 인해 수 없이 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며 번뇌하였지만, 사건처리 과정에서 ‘흑을 백으로, 백을 흑’으로 바꾸는 지휘는 결단코 하지 않았다는 점만은 자부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서는 이 지검장 재임 중 여권 실세 여루 의혹이 제기된 옵티머스자산운용 사건에 대한 축소 배당은 두고두고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앞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사건이 반부패수사부로 보낼 줄 알고 서울중앙지검에 이 사건을 배당했는데, 나중에 보니 조사부에 배당됐다고 들었다”고 발언한 바 있다. 주요 대권 주자 등 유력 여권 인사들이 연루된 이 사건은 결국 펀드 사기 사건의 주범인 옵티머스 김재현 대표 등을 기소하는 선에서 수사가 마무리될 가능성이 커진 상태다.

그는 편지 말미에서 “전북 고창에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형편에 장학생으로 선발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며 “초임검사로, 부장검사로, 그리고 검사장으로 열정을 불태웠던 서울중앙지검에서 최고의 인재들와 함께 손을 맞잡고 일할 수 있어 크나큰 영광이자 행복이었다”고 했다.

다음은 이 지검장의 감사인사 전문.
감사 인사드립니다.

중앙지검 가족 여러분, 이성윤입니다!

작년 1월 처음 뵙고 취임말씀을 드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 6개월이 지나 이제 작별인사를 드려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간 부족하고 미욱한 저를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중앙지검장으로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을 돌아보면,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배의 중심을 잡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고, 저 개인적으로는 수없이 많은 번민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임하면서 그 동안 말하지 못했던 몇 가지 소회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검찰의 일부 잘못된 수사방식과 관행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어, 기본과 원칙, 상식에 맞는 절제된 수사를 하여야 한다고 평소 생각해왔습니다.

끊임없이 사건을 고민하고, 수사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단계 단계마다 최대한 수긍할 수 있는 절차를 보장하고, 그에 따라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인 결론을 내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를 위해 현행 인권보호수사규칙, 형사사건공개금지등에 관한 규정 등 실제 수사를 받는 국민들이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규정부터 잘 지킬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또한, 검찰에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음주문화를 비롯한 시대에 맞지 않는 조직문화가 여전하다는 비판을 받아들여, 시대나 상황에 맞는 독서와 연구로 전문화와 변화를 도모하고 구성원 개개인의 개성과 자율을 최대한 신장시키는 조직문화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휘해왔습니다.

이러한 형법의 겸억성(謙抑性)을 생각하는 수사방식을 관철하고, 잘못된 조직문화 등의 개선을 위해 나름 노력을 했습니다만 저의 역량부족으로 미흡한 점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선, 최근 제가 대검찰청 반부패강력부장으로 근무 당시 발생한 일로 기소가 되어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또, 중앙지검장 부임 이후 왜곡된 시선으로 어느 하루도 날선 비판을 받지 않은 날이 없었고, 저의 언행이 의도와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거나 곡해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검찰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검찰이 처한 안타까운 현실로 인해 수 없이 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며 번뇌하였지만, 사건처리 과정에서 ‘흑을 백으로, 백을 흑’으로 바꾸는 지휘는 결단코 하지 않았다는 점만은 자부합니다.

오히려,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냉철한 고언과 비판은 저를 겸허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는 제가 버텨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제가 초임 시절부터 가졌던 검사로서 원칙과 마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전북 고창에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형편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서울지검 검사로 첫출발을 하였습니다.

초임검사로서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등을 수사하고, 법무부에서는 통합도산법 제정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2부장, 광주지검 특수부장 등 여러 청에서 주로 부패범죄 수사부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이렇게 검사로서 근무하는 동안 저는 선배들로부터 배웠던 것처럼 ‘검사는 수사로만 말한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심겨진 곳에서 꽃피워라’를 신앙적 좌우명으로 삼아,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법리와 증거에 맞는 수사결론을 위해 노력했다고 자부합니다.

이런 사정 속에서 초임검사로, 부장검사로, 그리고 검사장으로 열정을 불태웠던 이곳 서울중앙지검에서, 최고의 인재들와 함께 손을 맞잡고 일할 수 있어 크나큰 영광이었고 행복이었습니다.

저처럼 부족한 사람과 함께 근무하시면서 정말로 많은 수고와 애쓰신 점에 대해 감사와 미안한 마음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구성원 여러분 모두를 소중하게 받드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늘 고맙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2021. 6. 10. 이성윤 올림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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