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차를 어떻게 빼!” 구급차 양보위반, 더 늘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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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 막은 택시’ 사건, 그후 1년

2015년 7월 15일 국민안전처 주관으로 소방차 길터주기 훈련이 실시됐다. 구로소방서 응급차가 서부간선도로 서울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길터주기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2015년 7월 15일 국민안전처 주관으로 소방차 길터주기 훈련이 실시됐다. 구로소방서 응급차가 서부간선도로 서울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길터주기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여기서 차를 더 어떻게 뒤로 빼. 어린 ×들이 너무 ××× 없이 말하네.”

4월 10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주택가.

늦은 밤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택시와 구급차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구급차는 급한 환자를 싣고 한시라도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하는 상황. 택시는 길을 비켜준다며 뒤로 살짝 후진했지만 빠져나갈 공간은 여전히 부족했다.

구급대원들이 “차를 좀 더 빼야 나갈 수 있다”고 부탁했지만, 택시기사는 되레 차를 멈추고 언성을 높였다. 자신에게 “말을 기분 나쁘게 했다”는 이유였다. 구급차엔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환자가 타고 있었지만 기사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5분이나 더 지체하고서야 구급차는 겨우 골목을 통과했다. 소방서 관계자는 “솔직히 출동 때마다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 구급차 양보 위반, 오히려 늘어나

이달 8일은 지난해 서울 강동구에서 한 택시기사가 고의로 구급차를 들이받고 이송을 지연시켜 결국 79세 여성 환자가 목숨을 잃은 사건이 벌어진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고인의 아들이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에 약 73만 명이 동의하기도 했다. 택시기사 최모 씨(32)는 업무방해죄 등으로 징역 1년 10개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사건 이후 구급차 이송 상황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통계만 보자면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나빠지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도로교통법상 긴급자동차에 대한 양보 의무 위반은 지난해 전국에서 29건이 발생했다. 2019년(8건)까지 꾸준히 감소하던 수치가 도로 약 3.6배로 늘어났다. 한 구급대원은 “솔직히 빠른 이송을 위해 그냥 넘어간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 위반은 훨씬 더 많다고 봐야 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12월 인천에선 한 시민이 환자를 이송할 구급차를 훔쳐 타고 간 사건도 벌어졌다. 연수구 송도동에서 박모 씨(50)가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데리러 간 사이에 시동이 걸려 있던 구급차에 몰래 올라타고 약 15km를 운행하고 다녔다. 약 1시간의 추격전 끝에 붙잡힌 박 씨는 경찰 조사에서 어이없게도 “친구를 만나러 가려 했다”고 진술했다.

현행법상 박 씨처럼 고의적으로 환자 이송을 방해하면 응급의료법 등에 따라 최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그런데 길에서 구급차나 소방차에 양보하는 것 역시 ‘법적 의무’다. 현행 도로교통법은 “모든 운전자는 긴급자동차가 우선 통행할 수 있도록 진로를 양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 경찰 약속 9개월 지났건만 그대로

문제는 고의적 방해는 무거운 형사처벌을 내릴 수 있지만, 양보 의무 위반은 3만∼7만 원의 범칙금 처분이 전부라는 점이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긴급환자의 시급한 이송을 지체시킨 건 마찬가지인데 양보 의무 위반에 대한 범칙금이 지나치게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경찰 역시 이에 대해 개선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지난해 9월 2일 ‘구급차 막은 택시’ 사건 관련 청와대 국민청원 답변에서 “운전자의 경각심 제고와 ‘골든타임’ 확보를 위해 긴급자동차 진로 양보 의무 불이행 시 범칙금 등의 수준을 크게 상향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답변 뒤 9개월이 넘었지만 양보 의무 위반의 범칙금은 그대로다. 한 교통 전문가는 “범칙금 액수를 정하는 시행령 개정은 국회를 거칠 필요도 없다. 국무회의 의결만 거치면 가능한 사안”이라며 “경찰청장 약속과 달리 개선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 측은 도로교통법의 전면적인 개정을 추진하고 있어 시일이 걸렸다고 해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현행 도로교통법을 개정하면 하위 법령인 시행령도 연구용역을 거쳐 바뀌게 된다. 이때 다른 법규 위반의 과태료나 범칙금과의 형평성 등을 고려해 조정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김태성 기자 kts5710@donga.com
#구급차에 양보#법적 의무#응급환자 이송#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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