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한일관계까지 판결문에…文발언 이후 확 달라진 사법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7일 21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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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판결 1시간 만 “한일관계 고려해 日과 협의”
文대통령 1월 “위안부 판결 곤혹·강제징용 배상 판결 바람직 안해”
이후 4월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 각하 이어 이번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도 각하
한일관계 복원 추진 정부 외교 운신 폭 넓어졌지만 日, 상반된 판결 이용할 수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이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각하 판결을 내리면서 한일 관계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린다. 특히 외교가는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이례적으로 한미동맹과 한일관계, 국격 등 외교적 문제까지 거론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에 대해 “곤혹스럽다”고 말한 뒤 3개월 만인 4월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 소송에 재판부가 각하 판결을 내린 것과 무관치 않다는 것.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한일관계 복원에 나선 문재인 정부의 외교 기조에 사법부가 보조를 맞추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외교부는 위안부 피해자에 이어 강제징용 피해자까지 한일관계 경색의 원인이 된 과거사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 여건은 마련됐다는 속내다. 다만 우리 사법부가 잇달아 엇갈린 판결을 내놓으면서 향후 협상 과정에서 일본이 배상은 물론 사과 책임까지 거부하는 데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외교부, 판결 1시간 만 “한일관계 고려”
외교부는 이날 판결 1시간 만에 “관련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면서 “정부는 앞으로도 사법 판결과 피해자 권리를 존중하고 한일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양국 정부와 모든 당사자가 수용 가능한 합리적 해결방안을 논의하는 데 대해 열린 입장으로 일 측과 관련 협의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판결이 나오자마자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일본과 외교 협상을 통해 풀겠다는 입장을 확실히 한 것이다.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판결문에 강제집행이 이뤄질 경우 일본과 관계가 훼손될뿐더러 “한미동맹으로 우리 안보와 직결돼 있는 미국과의 관계 훼손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판시했다. 강제징용 판결이 개인의 청구권 문제를 넘어선, 한국의 외교·안보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중대 사안이기 때문에 결국 외교로 풀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것이다.

재판부는 또 강제징용 사건이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게 될 경우까지 상정한 뒤 “대한민국이 패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면서 “만약 패소하는 경우 대한민국 사법부 신뢰에 치명적 손상을 입게 돼 이제 막 세계 10강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문명국으로서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 한다”고 지적했다. 강제징용 문제의 국내적 해결이 대외 국격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 1월 文 대통령 발언 이후 달라진 사법부 판결
이번 판결은 문재인 대통령이 1월 첫 위안부 피해자 승소 판결에 대해 “한일 양국이 대화를 하고 있는 중에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 뒤 나온 것이라 주목된다. 문 대통령은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강제집행 방식으로 (한국 내 일본기업 자산이) 현금화되는 등의 판결은 한일관계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징용 피해자가 일본 기업에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한일관계 등 외교 문제까지 거론한 이번 판결은 문 대통령의 발언 기조와 일치한다. 지난해까지만해도 일본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던 문 대통령이 1월을 발언을 기점으로 사법부 판결 기조도 완전히 달라진 것.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사법부의) 기류가 다소 변한 것 같다. 재판부가 각 소송을 개별적으로 판단하겠지만 대통령 발언 이후 나오는 재판들이 외교적 해결 여건을 열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단 이번 판결로 ‘배상 책임을 인정한 사법부 존중’과 ‘배상 책임을 거부하는 일본과 외교적 해결’ 사이 딜레마를 겪던 정부가 외교적 운신의 폭은 넓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사법부 판결을 존중한다’고 말해온 우리 정부로서는 적극적으로 외교 교섭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정부는 최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민관협의를 개최하는 등 한일 갈등 사안을 외교적으로 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어 강제징용 문제도 이 같은 방식으로 논의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다만 2018년 대법원 판결과 정반대 결과가 나옴에 따라 향후 일본이 판결 결과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 협상을 이끌어 나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배상 책임을 거부하는 것뿐 아니라 사죄까지 거부할 경우 피해자들의 의견을 들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부고 곤혹스러워진다. 일본 정부는 이번 판결 결과에 대해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피해자들이 항소 의사를 밝힘에 따라 상급심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권오혁 기자 hy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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