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날 보수우파 논객이라 하는데, 요즘의 보수 진영 보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1일 16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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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이천시 부악문원의 뜰에 선 이문열 작가는 “고향으로 짐 일부를 옮기고 있고 정원수 손질도 못해 좀 어수선하다. 노후엔 
안동으로 내려갈까 했는데 35년이나 살았으면 여기가 고향이지 어딜가나 싶기도 하다”며 웃었다. 이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경기 이천시 부악문원의 뜰에 선 이문열 작가는 “고향으로 짐 일부를 옮기고 있고 정원수 손질도 못해 좀 어수선하다. 노후엔 안동으로 내려갈까 했는데 35년이나 살았으면 여기가 고향이지 어딜가나 싶기도 하다”며 웃었다. 이천=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50년 동안 열심히 쓴 것치고는 생각보다 원고 양이 많지가 않습니다. 요즘은 예전 원고들 보며 비감에 젖기도 하고 달콤한 꿈에 젖기도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경기 이천시 부악문원에서 지난달 28일 만난 이문열 작가(72)의 작업대에는 두꺼운 국어사전과 함께 빨간펜으로 교정 표시가 된 ‘젊은 날의 초상’ 원고가 올려져 있었다. 지난해 민음사와의 계약을 끝내고 RHK로 둥지를 옮긴 뒤 대표작 ‘삼국지’ ‘사람의 아들’ 등을 개정판으로 내고 있다. 단순한 교정이 아니라 문체와 내용도 고친다. 이런 식으로 오랜 원고를 손봐 60여 권을 순차적으로 다시 낼 계획이다.

그가 35년을 지낸 부악문원은 한때 사숙하는 문청들을 받아 강의도 하며 붐비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고즈넉했다. 그는 “거창하게 시작했는데 시대와도 안 맞고 아예 없는 사람 취급당할 만큼 여러 일을 겪다보니 관두게 됐다. 이제는 안동(고향) 말로 ‘영감 할마이’ 둘만 산다”며 웃었다.

―지난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소회가 어떤가?

“글이란 게 한번 떠나면 그만이라지만 아직 살아 있으니 추고의 권리도 있는 게 아닌가. 고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싶으니 좀더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그때의 사려부족, 감정이 과장된 부분 등은 고친다. 욕심도 많고 후회도 많은 작업이 되고 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열 손가락 같은 것”이라면서 개정판 ‘사람의 아들’을 펼쳐 보였다. 등단 1년차 신인 작가인 그는 이 작품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고 일약 스타가 됐다. 그는 “이번에 고치고 나서보니 개정서문만 50여 쪽을 썼더라”며 웃었다. 요즘 붙들고 있는 ‘젊은 날의 초상’은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되돌아보면 애잔해지는 작품이다. 그는 “가열했던 시절의 이야기”라며 “이런 작품들이 10여 편 정도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개정판 ‘삼국지’는 절판되기 전보다 4배 이상 팔리고 있다.

―인터넷 댓글을 보는지? ‘삼국지’를 비롯한 개정판 출간에 독자들이 무척 반가워한다.

“그런 반응이라면 힘이 날 것 같은데 잘 안 보니 모른다. 세상이 망한 건 말이 망해서다. 인터넷 세계는 즉문즉답이다. 자기 몸보다 더 큰 도끼와 칼을 함부로 휘두르면서 책임은 안 진다. 그런데 지금 이 세계의 중요한 결정을 그런 식의 사람들이 하니 문제다. 정의기억연대 사태도 봐라. 인터넷이 또 요사를 부리면서 논점을 흐린다.”

그는 ‘우파작가’란 이유로 공격 받았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2001년 작가로서 치명적 상처가 된 ‘책 장례식’이 벌어진 곳도 문원 입구 언덕길이었다. 그는 “아직도 피해의식 같은 게 있다. 이렇게 조리돌림 당하는 걸 보면 누군들 나 같은 목소리를 낼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실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오” 하다가 “그래도 글 쓴 게 50년인데 이런 걸로 징징대면 안 된다”며 웃었다.

―요즘의 보수 지형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

“이 판세가 이해 안 된지 한 달 가까이 됐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쉽게들 나를 ‘보수우파 논객’ ‘보수당 지지자’라고 하더라. 다 시인했다. 하지만 현재의 이 정당(미래통합당)이 보수라면 나는 보수논객도, 우파도 아니다. 70년 분단사를 가진 나라의 보수 정당이 이념을 생각하면 안 된다니 무슨 수작인가.”

이문열 작가
이문열 작가


―작업에는 일정한 루틴이 있으신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40년 가까이 유지해온 루틴이 있었다. 새벽 2, 3시까지 쓰고 오전 9시 넘어 늦게 일어나는 식으로 매일 10시간 넘게 썼다. 신장암 수술을 한 후부터 부쩍 힘에 부친다. 낱말이 기억이 안 나 생산성이 반으로 떨어졌다. 생각나지 않는 단어는 컴퓨터나 사전이 있어도 불러 올 방법이 없다. 70세 넘은 늙은 작가는 이해할 것이다.”

―요즘 어떤 책을 주로 읽으시나. 책 읽는 이들이 자꾸 줄어드는 시대다.

“이제는 읽어서 어떻게 써먹겠단 생각은 못한다. 내게 가장 흥미로운 게 우선이라 중국 역사책 위주로 본다. 지금까진 잠잠하다가도 한번씩 산문 붐이 크게 일었다. 또 한 번 올 때가 됐다 싶은데, 요즘은 그런 게 잘 없다. ‘삼국지’ 아니었다면 나도 이렇게나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다들 어떻게 사는지 걱정이다.”

이천=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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