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4년 5월 21일 19시 54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매국(賣國)의 수괴, 이완용.
그의 ‘주저 없는’ 친일행위에는 현기증이 인다.
1910년 데라우치 통감은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하던 송병준을 내세울 것이라고 소문을 흘렸다. 한일합병을 앞당기기 위한 술수였다.
이완용은 안절부절못했다. 자칫하면 ‘합방’의 공(功)과 그에 따른 행상(行賞)을 놓칠 판이었다. 이 우열을 가리기 힘든 매국의 라이벌에게 ‘보복’을 당할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는 급히 통감부에 통보했다. “지금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은 나올 수 없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세 차례에 걸쳐 신문에 경고문을 내보낸다.
“조선독립 선동은 허설(虛說)이요 망동(妄動)이라. 한일합방은 조선의 유일한 활로(活路)일지니.” 가히 민족반역자의 극명한 논리였다.(강만길·상지대 총장)
매국의 대가는 ‘달았다’. 이완용의 친일가문은 대대손손 부와 명예를 누린다.
그는 ‘합방’ 직후 훈(勳)1등 일본백작의 작위와 15만엔의 은사금, 총리대신 퇴직금 1458엔을 받았다. 당시 고급관료의 평균월급이 20엔. 무려 630년간의 급여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그의 재산을 반환받고자 소송을 벌여 일부 승소하기도 했으니, 이 ‘매국의 장물(贓物)’을 사유재산으로 보호해야만 하는가.(신용하·서울대 명예교수)
이완용은 민족의 반역자였다. 매국의 원흉이었다.
그러나 “그가 며느리와 사통했다”는 식의 근거 없는 이야기는 역사의 진실을 흐릴 뿐이다.
한때 독립협회 발족에 관여하기도 했던 그에게도 매국의 변(辯)은 있다.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를 뿐, 달리 길이 없다.”
망국의 과정에서 대원군이나 민비, 고종 역시 이완용 못지않은 책임과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터이다. 왕과 내각은 어찌 그리 부패하고 무능했던가.
나치 독일의 죄과를 히틀러 한 사람에게 물을 수 없듯이, 망국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씌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완용의 악(惡)이 모두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으니.
히틀러가 그러했듯이, 그도 시대의 산물이었던 거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