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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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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 집안이 독립운동 투신… 26일 조소앙 선생 일가 추모제

    온 집안이 독립운동 투신… 26일 조소앙 선생 일가 추모제

    26일 경기 양주에서는 ‘대한민국 100주년 기념탑’ 제막식이 열린다. 장소는 남면 황방리에 있는 조소앙기념관이다. 조소앙선생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리는 이날 행사에는 조소앙 선생 일가 독립운동가 합동추모제도 함께 진행된다. 조소앙(1887∼1958·본명 조용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 2019-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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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 구장 주도로 조직적 만세시위… 농촌서도 저항의 불길

    청년 구장 주도로 조직적 만세시위… 농촌서도 저항의 불길

    늦은 밤 경기 양주 백석면 연곡리에 많은 면민들이 모여들었다. 두 사내가 앞에 나섰다. 안종태(36세·당시 나이)와 안종규(30세) 형제였다. 안종태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만 살 수 있다”고 연설했다. 1919년 3월 27일 밤 시작된 백석면 시위는 다음 날에도 …

    • 2019-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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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례선 목사 사택서 시작된 ‘독립열망’… 日帝 도끼-총으로 탄압

    구례선 목사 사택서 시작된 ‘독립열망’… 日帝 도끼-총으로 탄압

    “머지않아 중앙에서 경천동지할 민족적 거사가 있을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19년 2월 중순. 함흥의 학생단체가 파견한 박승봉은 함경북도 성진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뒤 거사 준비를 당부했다. 이후 강학린 목사를 비롯해 김상필 강희원 김영배 등은 기독교계…

    • 201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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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항일시위 거센 북한지역 우물-식품에 독약 투입 ‘만행’

    1919년 3월 중순 이후 만세운동이 갈수록 격렬해지자 일본인들이 한국인이 사용하는 우물과 식품 등에 독약을 집어넣었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이는 곧 사실로 드러난다. 박은식은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평안북도 의주군과 용천군 등지에서 일본인의 사주로 우물에 독약을 넣은 일…

    • 2019-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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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독립선언서’ 日감시뚫고 도착… 경성과 동시에 “독립 만세”

    ‘3·1독립선언서’ 日감시뚫고 도착… 경성과 동시에 “독립 만세”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내 서부야소교(의주서교회) 인근 공터. 의주서교회와 의주지역 유지들이 후원해 설립한 양실학교의 교사와 학생, 학부형 등 의주군민 700∼8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어서 모임은 교회 대부흥회처럼 보였지…

    • 2019-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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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해 한용운, 사천 다솔사서 ‘공약 3장’ 초안 구상

    만해 한용운, 사천 다솔사서 ‘공약 3장’ 초안 구상

    봉명산에 있는 천년고찰 다솔사는 경남 사천 지역 항일운동의 성지로 불린다. 다솔사 홈페이지에도 ‘1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다솔사는 일제강점기 한용운이 수도하던 곳으로 항일기지 역할을 했다’는 소개글이 올려져 있다. ‘사천항일독립운동사’ 등에 따르면 만해 한용운은 1917년부터 1…

    •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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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장 첫골 신호로 “독립만세”… 가슴속 태극기 꺼내 휘날려

    축구장 첫골 신호로 “독립만세”… 가슴속 태극기 꺼내 휘날려

    경남 사천시는 매년 3월 21일에 축구 경기를 열어 3·1절을 기념한다. 100년 전 이날 사천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펼쳐졌던 축구 만세시위를 기리기 위해서다. 2001년 시작해 벌써 19년째다. 별도의 3·1절 기념행사를 갖지 않는 대신 이날 행사에는 학교와 총동창회뿐만 아니라 사천…

    •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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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31일 밤 山 50여곳서 횃불 올라… 2500여명 군중 ‘봉화시위’

    3월31일 밤 山 50여곳서 횃불 올라… 2500여명 군중 ‘봉화시위’

    1919년 3월 14일 충남 아산 온양면 읍내리 온양시장 장터에서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스물세 살 청년 현창규가 주도한 시위였다.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현장에서 만난 천도교 교사 권병덕의 권유로 고향인 온양면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거사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 2019-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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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정복귀 대신 ‘근대적 국가’ 설립 꿈꾼 독립운동

    왕정복귀 대신 ‘근대적 국가’ 설립 꿈꾼 독립운동

    수안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홍석정 한청일 이영철 등 천도교 지도부는 “우리는 이미 조선 독립을 선언하였고, 현재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시대이니 헌병분대의 관할권을 즉시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으니 일본 제국주의 무단통치의 상징인 헌병대 권력을 넘겨받겠다는 뜻…

    • 2019-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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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와 공화는 세계의 대세”… 계층 초월한 외침에 日헌병 굴복

    “자유와 공화는 세계의 대세”… 계층 초월한 외침에 日헌병 굴복

    1920년 7월 22일 오전 8시 40분경 서울 정동의 경성지방법원 특별법정. 불과 며칠 전 3·1운동 민족대표 48인에 대한 공판이 열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법정에서 불빛에 번득이는 금테 안경을 두른 일본인 검사가 심리를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치안을 방해…

    • 2019-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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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병에 끌려가면서도 “독립만세”… 길가의 주민들도 함께 “만세”

    헌병에 끌려가면서도 “독립만세”… 길가의 주민들도 함께 “만세”

    ‘나라 잃은 2000만 겨레의 울부짖는 만세의 외침은 기미년 3월 1일을 기해 삼천리 방방곡곡은 물론 멀리 해외까지 노도(怒濤)처럼 메아리치며 퍼져나갔다. 때를 같이하여 이곳 산청에서 봉기한 수천 군중이 3월 21일 거사해 약소민족의 설움을 세계만방에 호소했다. 왜경의 총탄 앞에 쓰러…

    • 201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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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0명 시위 열흘뒤 1500명… 총칼 앞에서 더커진 만세함성

    1000명 시위 열흘뒤 1500명… 총칼 앞에서 더커진 만세함성

    저녁 무렵 홍범식(1871∼1910)은 재판소 서기 김지섭을 불러 상자 하나를 주면서 집으로 보냈다. 금산군수로 부임한 홍범식은 고향 충북 괴산을 떠나 관아의 객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귀가한 김지섭이 열어본 상자에는 가족에게 보내는 유서가 들어 있었다.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

    • 201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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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인 主山 등서 게릴라 시위… 10여일간 ‘야간 산상봉화’ 이어져

    태인 主山 등서 게릴라 시위… 10여일간 ‘야간 산상봉화’ 이어져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고향으로 내려가 나랏일을 하시오.” 1919년 2월 말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는 고종 황제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경성에 도착한 박지선, 김현곤, 송수연 등 전북 정읍군(현 정읍시) 태인면 출신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하 송진우는 3·1만세운동 거사계…

    • 2019-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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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軍에 맞선 33인의 ‘일신단’… 총탄 앞에서도 “우리가 주모자다”

    日軍에 맞선 33인의 ‘일신단’… 총탄 앞에서도 “우리가 주모자다”

    만세시위 열기가 전국으로 퍼져 나가던 1919년, 영호남을 잇는 교통 요충지인 경남 하동군에도 3·1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북쪽으로 지리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남해군과 연결되며, 서쪽으로 섬진강을 경계로 전남 광양시와 접한 하동은 각종 물화(物貨)가 모이는 곳이다. 서울…

    • 2019-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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