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2일 오후 창덕궁에서 열린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 순종 황제는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등 일제 통감부와 사전 조율을 마친 대신들이 재가를 요청하는 문서를 앞에 두고 2시간 동안 침묵했다. 그 문서는 내각총리대신에게
《1895년 10월 8일 왕비시해사건(을미사변) 후 건청궁(경복궁 내 왕의 처소)의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갇혀 지내야 했다. 달포가 지난 무렵, 왕을 구출하려는 친위 쿠데타가 있었지만 정보 누설로 친일 정권에 일망타진됐다. 왕비시해 소문이 퍼져 의병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상
100년 전, 우리는 나라를 잃었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1910년 8월 22일, 그리고 일주일 뒤 순종 황제의 이름으로 이 조약이 포고된 8월 29일. 경술년의 국치(國恥)였다. 태양조차 다시 떠오를 것 같지 않던 충격이었건만 시간은 쉼 없이 흘러 조약이 포고된 지 어느덧 3
■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되짚어본 을미사변 현장운요호사건… 청일전쟁… ‘국력쇠약 대가’왕실 짓밟히고 국모 피살되는 수모까지日, 사과는커녕 역사의 진실마저 은폐 1895년 10월 8일 오전 5시 반, 괴한들이 긴 사다리를 타고 경복궁 담을 넘어 광화문을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