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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다시 보자]<2>벽화로 본 고구려…(3)집안살림

입력 2004-02-02 18:09업데이트 2009-10-10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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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부쩍 주부들의 ‘명절증후군’이라는 말이 오간다.

온 가족의 연휴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야 하는 여성들의 고단함에서 나온 말이다. 고구려시대의 아낙네도 그랬을까. 물론 왕족 여자나 귀부인들은 손에 물 묻히는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여성들의 집안 살림살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 떡 찌는 부엌

고구려 여성들이 집안일을 하는 모습은 황해도 안악 3호분, 남포시 태성리 1호분과 약수리 벽화고분 등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고분들에 나타난다. 안악 3호분의 앞 칸 동벽에 딸린 곁방에 빙 둘러 집안의 생활상이 그려져 있다. 방에 들어서면 맞은편 동벽에 부엌과 푸줏간이, 북쪽에 우물이, 남쪽에는 외양간이, 서벽 입구 왼편에 마구간이, 입구 오른편에 방앗간이 각각 배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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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에 그려져 있는 우물 풍경. 지렛대와 도르래를 이용한 우물은 4세기 중엽 고구려 사람들의 과학 기술 수준을 가늠케 해 준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서민층 여성들의 가사노동 현장을 들여다보자.》

동벽의 왼편에 비스듬히 사선 구도로 그려진 가옥이 부엌이다. 측면에 출입구가 나 있고, 정면은 개방된 형태로 부엌 내부가 공개돼 있다. 한데 그 작도법이 뒤쪽으로 넓은 역원근법이다. 뒤로 갈수록 좁아지는 투시도법과는 반대로 그려진 것이다.

흔히 고대회화에서 나타나는 미숙한 표현으로 치부될 수도 있으나, 부엌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담는 데는 오히려 효과적인 기법이다. 지붕 위에는 까치 한 마리가 앉아 있고 부엌 앞에는 두 마리의 개가 어슬렁댄다. 부엌 주변의 풍속화답다.

부뚜막에 얹힌 큰 그릇은 떡시루다. 앞 여인은 쭈그려 앉아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다. 부뚜막 뒤의 ‘아비(阿婢)’라는 여인은 오른손에 주걱을, 왼손에 긴 젓가락을 들고 있다. 아마도 떡시루에 물을 축여 가며 긴 젓가락으로 떡이 익었나 찔러 보는 장면인 것 같다. 뒤쪽의 여인은 교자상에 닦은 그릇을 포개 쌓는다.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엌 그림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부뚜막이다. 이 모양과 똑같은 이동용 쇠부뚜막이 평북 운산의 3, 4세기 적석총인 용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바 있다. 연통 부분이 잘려 있으나 66.7cm 길이의 ‘ㄴ’ 자형으로, 아궁이가 옆에 뚫려 있다. 아궁이와 연통이 한 방향인 중국제품과는 다르다.

이 떡 찌는 일은 장례행사에서 중요한 일로 농경문화의 발달 정도를 알려준다. 떡시루는 벼농사가 정착된 청동기시대부터 나타나며, 손잡이가 달리고 둥근 밑바닥에 여러 구멍이 뚫린 토기가 그 원형이다. 그런데 안악 3호분의 밑이 납작한 토기는 우리 할머니들이 집에서 사용하던 떡시루 옹기와 흡사하다. 고구려의 농업기술이 꽤 높았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 물 긷는 우물

부엌 옆에는 푸줏간이 있다. 멧돼지, 노루, 꿩 같은 조류 등을 4개의 S자형 쇠고리에 걸어놓은 모습은 여전히 사냥을 통해 먹을거리를 구했던 고구려인의 식(食)문화를 알려준다.

평북 운산의 3∼4세기 적석총인 용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이동용 쇠부뚜막. 안악 3호분의 벽화에 그려진 부뚜막과 형태가 똑같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또 부엌의 왼쪽 벽화는 ‘정(井)’이라 쓰여 있는 우물이다. 정사각형의 목책을 두른 우물에는 모래주머니를 달아 지렛대와 도르래를 이용한 용두레 형태의 물 긷는 장치가 있다. 고구려인의 과학적 지혜를 보여준다.

우물가에는 두 여인이 떡시루와 그릇들을 닦으러 나온 듯하다. 서 있는 여인 위에 ‘아광(阿光)’이라는 붉은색 글씨가 씌어 있다. 또 우물 앞에는 물을 담는 목제 구시통(구유)이, 그 왼편으로는 두 점의 배부른 큰 토기가 놓여 있다. 역시 당당한 형태의 고구려 실물토기와 근사하다.

우물의 오른편 벽면 그림은 ‘대(대)’라고 쓰인 방앗간이다. 단칸집 안에서 디딜방아를 찧고 있는 두 여인이 보인다. 줄을 잡고 한 발을 구르는 자세나 공이에서 곡물가루를 정리하는 모습이 근래까지 전해져 오는 것과 닮아서 흥미롭다. 붉은 글씨의 ‘아비’나 ‘아광’ 등 여인들은 모두 올린머리에 가채를 하고 있고 원피스 차림이다.

이처럼 벽화의 부엌과 푸줏간 등은 고분에 부장품으로 실물 부뚜막을 넣는 것과 함께 사후에도 무덤 주인이 그 안에서 먹을거리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일 게다.

오랜 민속으로 내려오는 가택 신앙과도 관계가 깊다. 집안에는 조상신, 문신(門神), 우마신(牛馬神) 등을 모셔 가정의 화복과 안락을 꾀하였다. 고구려 여성들의 집안 살림은 불과 30, 40년 전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던 우리네 농촌 가정의 정겨운 모습과 비슷했다.

명지대 미술사학과 이태호 교수


▼안약3호분 주인은…南 “장군 冬壽”-北 “고국원왕” ▼

1949년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세 고분이 발굴됐다. 이 중 오국리의 3호분 벽화는 약 30×33m의 방형(方形)에 높이 7m로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외형이 가장 크다. 내부 묘실도 앞칸과 안칸, 앞칸의 좌우 곁방, 회랑 등 다실(多室) 구조다.

안악 3호분에서는 앞칸 서쪽 곁방의 바깥벽에 씌어진 ‘동수(冬壽)가 벼슬을 살다 영화(永和) 13년(357) 69세에 죽었다’는 글이 주목을 끌었다. 고구려 무덤 중 고분의 제작시기가 밝혀진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동수는 요동사람으로 고국원왕 6년(336) 전연(前燕)에서 망명 온 장군이었다(‘진서·晉書’ 등에는 ‘동壽’로 표기).

한국 일본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안악 3호분이 동수의 묘라고 본다. 그러나 북한 학계에서는 문제의 글이 무덤 주인을 수호하는 무인 인물화 위에 씌어져 있는 점을 들어 동수가 묘 주인을 수호하는 장군이라고 본다. 고분의 크기는 물론 묘 주인의 초상화와 회랑의 대행렬도 같은 벽화의 내용으로 볼 때 안악 3호분은 장군묘가 아니라 왕묘라는 것이다. 1960년대에는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설을 제기했다가 근래에는 고국원왕 무덤으로 확정하고 있다. 아직도 동아시아 학계에서는 이 고분을 두고 ‘동수’와 ‘고국원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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