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서른셋의 불꽃삶 '에비타 페론'

  • 입력 2001년 12월 21일 17시 53분


에비타 페론/알리시아 오르띠스 지음 /346쪽 1만1000원 홍익출판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여.(Don’t cry for me Argentina)”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뮤지컬 ‘에비타’(1979)에서 보여준 것은 20세기 신데렐라의 신화였다. 아르헨티나 대지주의 서녀(庶女)인 에바 두아르테에서 나라의 어머니인 에바 페론(Eva Feron)으로 도약한 신분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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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점에서 에바는 가난한 자들에게 빵과 집을 마련해주는데 헌신했던 천사였으며, 동시에 남편 페론 대통령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권력을 남용했던 투사였다. 돌연한 자궁암이 불러온 서른 셋의 요절은 불꽃 같은 삶을 세기의 신화(神話)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에바 페론(1919∼1952)에 대한 매혹적인 평전인 이 책은 그녀에 대한 신화를 차곡차곡 분해한 뒤 재조립한다. 클로즈업만 아니라 풀샷과 롱샷 등 시점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역사적 맥락속에서 에바의 제자리를 찾아준다. 한마디로 그것은 “부유한 자들의 창녀, 가난한 자들의 성녀”라는 이중성이다.

시골 출신인 에바는 배우로 출세하기 위해 15세에 집을 나왔고, 도회지 삼류극장과 영화판에서 단역을 위해서 많은 남자와 몸을 섞어야 했다. 그러나 배고픔속에서도 자존심 만큼은 버리지 않았던 그녀는 운좋게도 아르헨티나 군사 쿠테타의 주역인 페론 장군의 정부(情婦)가 될 수 있었다.

세계 역사상 가장 나이 어린 20대 중반의 퍼스트 레이디가 된 것은 역사적 격변기에 얻은 행운이 아나라는 점을 이 책은 잘 보여준다. 밑바닥 생활의 경험은 권력자의 멸시속에서도 노동자를 옹호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정적에 의해 암살 직전까지 갔던 페론의 목숨을 구해내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평전이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것은 책 갈피마다 나타나는 에바의 이중적 태도다. 그녀는 다른 권력자와 부자에게는 거침없이 상소리를 뱉으면서 건방을 떨지만, 빵을 달라는 빈민에게는 깍듯하게 대하며 빵과 집까지 마련해주었다.

파티에서는 클레오파트라처럼 화려한 매무새로 치장하는 극도의 사치를 즐기면서도, ‘에비타 페론 재단’를 만들어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노동자와 여성의 고통을 해결하는데 매달린 점도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열정앞에서 그녀가 노동자의 욕구를 부추겨서 지금까지 아르헨티나를 세계에서 가장 파업이 흔한 나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에바는 자주 “나에겐 오직 시간만이 적”이라면서 빈민을 돌보는데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는 그 동력을 남편 페론과의 불화로 생긴 깊은 외로움과, 불순했던 과거의 상처를 지워보려는 자존심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을 꿈꾸는 불완전한 인간이 겪은 자신과의 아름다운 투쟁의 모습을 본다.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 외로움이 지나쳐 /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신현림 ‘나의 싸움’ 중). 박지연 옮김, 원제 ‘Eva Peron’(1995).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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