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 개념 중 ‘엔트로피’라는 개념이 있다. 무질서도(無秩序度)를 말한다. 예를 들어 향수 뚜껑을 열면 병 속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던 액체 향수가 공기 중으로 무질서하게 퍼져 나간다. 기체가 된 향수가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은 더 넓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질서도는 증가한다. 이런…
추운 겨울 새벽 출근길. 살짝 열린 연구실 문틈 사이로 책상에 앉아 있는 대학원생의 모습이 보인다. 밤을 새운 것일까? 꼼짝도 하지 않고 책을 보고 있다. 끝없는 공부. 저 학생은 자신이 끝 모를 공부의 시작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까? 앞으로 거쳐야 할 수많은 고비, 가는 길마다 지…
학기 말이 다가오고 있다. 대학생들은 학기말 시험을 치러야 하고,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은 졸업논문을 발표해야 한다. 항상 그렇듯 한 학기를 마무리할 때면 “아 벌써”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다. 위층 생명과학과 이 교수의 박사과정 학생이 이번 학기에 졸업한다. 박사 학위를 받…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찾아올 때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을지로3가역은 나에게 가장 슬픈 지하철역이다. 몇 해 전 아버님이 을지로3가에 있는 백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입원하신 후, 나는 학교 일정을 끝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3가역에 내려 죽을 사들고 병문안을 하러…
얼마 전 학회 참석차 아르메니아공화국에 다녀왔다. 출발 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 무력충돌이 있어 양쪽에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는 보도를 접했다. 걱정했지만 도착해보니 학회장 주변은 가을 날씨처럼 평온했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아래, 코카서스 지역의 포도 익어가는 소…
20년 전 연구실 졸업생들을 얼마 전에 만났다. 일본에서 사는 제자가 서울을 방문한 터라 환영회 겸 겸사겸사 모이게 되었다. 그 제자는 내 첫 박사학위 제자로, 일본으로 건너가 박사 후 과정을 밟은 후 지금까지 쭉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일본의 연구소에서 연구 …
나는 달에 대한 꿈이 있다. 실향민도 아닌데 ‘달’을 그리워한다.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았는데, 1969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맞다, 나는 아폴로 키드다. 초등학교 때, 우주비행사가 유인 달 탐사선인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을 향해 3일간 날아간 후 달에 착륙해 국기를 꽂고, 월석…
“일요일 논문을 쓰기 위해 학교 연구실 책상 주위를 배회했지만 두 줄을 넘길 수 없었다.” 사학과 원로 고 이기백 교수의 수필에 나온 한 문장이다. 논문 쓰는 일이 주업인 내게 이 한 줄의 문장은 지금까지도 위안이 되곤 한다. 논문을 쓰다 보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논문 쓰는 일…
대학에 강의 평가 제도가 있다. 학생들은 강의 평가를 해야 자신의 성적을 알 수 있으니 대부분 무기명으로 강의평을 적고 점수를 매겨 강의를 평가한다. 이 강의 평가 점수는 전체 교수들과 비교되어 다시 상대적인 점수로 평가된다. 이런 제도는 30년 전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상상조차 할…
코카서스 산자락 아르메니아공화국의 알센 박사가 우리 연구실에 왔다. 매년 방학이면 연구실을 방문해서 함께 연구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3년 만에 온 것이다. 희끗희끗 흰머리에, 둥글게 나온 배까지, 더 교수다워져서 나타났다. 알센 박사는 아르메니아공화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서울에서…
대학 2학년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배웠다. 1980년대 초반 당시는 개인용 컴퓨터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1954년 IBM에서 개발한, 지금은 화석처럼 변한 ‘포트란’이라는 프로그램을 밤새워 공부한 후 연필로 작성해 제출하면, 전산실의 여직원이 한 줄 한 줄 타이핑해서 천공…
“이 교수, 연구비 됐어!” 위층에 있는 생명과학과 이 교수에게서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웬만해서는 전화를 하지 않는 친구다. 작년엔 과학재단 연구비 지원 사업에 프로젝트를 신청했다가 그만 떨어졌다. 그때 그 소식을 듣고 내 입에서 튀어나온 첫마디가 “개구리는?!”이었다. 연구비 심…
나에겐 멋진 스승이 한 분 계시다. 유학 시절 지도교수 연구실은 내 연구실과 같은 층에 있었다. 평소에 많이 소통하고 지냈지만, 서로 바쁠 때는 편지와 메모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집에 가기 전 장문의 연구 리포트를 지도교수 연구실 문 앞에 붙여놓으면 답장이 그다음 날 연구실 문 앞에…
누구나 “이거다!” 하는 때가 있다. 소설가는 한 인간의 서사를 들을 때, 시인은 이제껏 존재하지 않던 은유가 떠오를 때, 사진가는 빛이 만드는 공간을 볼 때, 정치인은 역사적 소명을 마주할 때가 바로 그때일 것이다. 물리학자인 나에게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 …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를 방문한 것은 25년 전이다. 당시 나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내가 있던 대학 연구실은 우크라이나의 V M 스비스타노프 교수를 초청했다. 그는 하르키우 저온연구소 소장으로, 극저온 실험에서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대가였다. 나는 그가 쓴 모든 논문을 외울 정도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