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봄은 다른 해보다 더디게 온 것 같다. 늦겨울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에 우리에게 전해진 너무나 놀랍고도 안타까운 소식 때문에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지나 따스한 봄을 맞이하는 감회가 무척 새롭다. 말할 수 없이 반갑기도 하다. 어떤 이는 매년 맞이하는 특별할 것 없는 봄이라고 …
컴퓨터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생 때였다. 1990년대 초반, 하이텔과 천리안 같은 PC통신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다. 그때의 나는 스무 살 언저리의 나이가 버겁기만 해 어떻게 하면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궁리하던 청춘이었다. 학교 강의를 …
필자가 서울대 의대 학장을 지내던 시절(1970∼76년)의 어느 날 윤일선 명예교수께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오셨다. 선생께서는 필자가 출생한 1923년에 일본 교토(京都)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한 국내 병리학의 대부이다. 광복 후에 서울대에서 의대학장, 대학원장, 총장을…
며칠 전 낭송가들의 모임에서 내게 전화가 왔다. 모임에 와서 시 한 편을 낭독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분주한 집안일로부터 잠시 손놓고 온 주부, 학생, 직장인이 함께한다고 했다. 내게 할당된 시간은 5분 남짓. 작은 무대에 누구든지 오를 수 있지만 한 편의 시를 낭독하는 시간은 나름대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2008년 조사한 ‘문화소비 유형의 인구학적 분포’에 따르면 선호하는 문화활동으로 클래식 음악을 꼽은 응답자는 1.3%에 불과했다. 15개 조사 대상 중에 끝에서 두 번째였다. 물론 여기서 선호한다는 의미는 자기 돈을 들여 공연장을 찾거나 음반을 구입한다는 적극적인…
나는 늘 1940년대 후반 태어난 내 나이 또래만 해도 500년을 압축해 살아왔다고 여기곤 했다. 어릴 때 살던 산골 동네에는 문명이란 없었다. 등굣길은 앞산 어스름이 어느 정도 걷혔는지, 닭이 운 지 얼마나 되었는지의 자연현상을 가늠하는 것이 기준이었다. 새해가 될 즈음 구장이 면에…
법정 스님이 입적했다는 뉴스를 듣는데 후끈한 것이 가슴에서 눈으로 올라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슴이 바늘에 찔린 듯 아릿해지면서 쿵쾅쿵쾅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5년 전 길상사에서 우연히 만나 ‘법구경’ 한 권 받은 게 전부였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도 놀랐다. 그 돌연함 속엔 …
부모가 자식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는다면, 부모가 준 유산을 그 자식이 가꾸고 챙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다. 법적 제재는 없지만 죗값은 받는다. 덜 행복하다. 나는 20대 중반에 집안의 수양딸이면서 친구인 동갑내기와 보증금 300만 원에 월 8만 원짜리 집을 얻어 분가했다. 경제적…
휴∼, 드디어 끝났구나. 밴쿠버 겨울올림픽의 성화가 꺼지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느낌이랄까. 막상 밴쿠버를 떠나려니 고통스러운 경험조차도 아련한 추억으로 느껴진다. 밴쿠버의 겨울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릴 때가 많다. 겨울올림픽 기간에 1주일 정도는 구름 한 점 …
탈북 새터민이 한국에 정착해서 겪는 어려움 중 하나를 말해보라고 하면 누구나 언어라고 대답한다. 남한 사람들은 영어를 너무 많이 써서 못 알아듣겠다는 얘기다. 이들의...
패션을 통해 드러난 미술적 아름다움, 미술의 영역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패션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 앙드레 말로가 저서 ‘상상의 미술관’에서 벽이 없는 미술관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제시한 때가 이미 반세기를 훌쩍 넘었다. 말로는 문화비평적 시각에서 이 미술관에 대해 예술작품을 소장, …
사랑은 뜻밖에도 고통의 감각으로 다가든다. 그리고 첫눈처럼 나를 둘러싼 도시와 골목들을 눈부시게 만들고 어느 날 가뭇없이 사라져버린다. 멀리 런던에서 한 작가가 타계했다는 소식은 깊이 잊고 있던 어떤 감정 하나를 생생하게 깨워 놓았다. 고양이처럼 아픈 신음을 내며 일어서는 감정, 그…
대학가에서 유행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논문 쓰기에 바빠 연구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연구의 결과물이 논문이니까 모순 되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긴 안목으로 큰 주제를 파고들어 가야 하는데 한 해에 한 편씩 내야 하니까 조그만 주제에 매달려 논문을 쓰…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은 그 무엇…
마음 문이 천국 문처럼 기분 좋게 열리는 친구들이 있다. 김치찌개 하나만으로도 너무 충분한. “와인이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술이 없어도 목마르지 않고 이야기가 마르지 않는데, 왜? 남자들이 술이 있어야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맨 정신이 자폐이기 때문이야.”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