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는 죄가 없다[김지현의 정치언락]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7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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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태극기부대야?” (변재일 의원)
“태극기, 우리가 빼앗아 와야 합니다.” (문진석 의원)
지난 16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장에서 들려 온 두 민주당 의원님의 대화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과 한일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던 이날 민주당은 ‘윤석열 대일 굴욕 외교 저지를 위한 의원 행동’을 제안하며 의총장을 온통 태극기로 도배했습니다. 회의장 전면 스크린에는 ‘역사를 팔아서 미래를 살 수는 없습니다’라는 문구 아래 대형 태극마크가 등장했습니다. 의원들은 각자 손에 태극기를 들고 흔들며 입장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와 이재명 대표, 정청래 최고위원(왼쪽부터) 등이 16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대일 굴욕외교 중단을 촉구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뉴스1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와 이재명 대표, 정청래 최고위원(왼쪽부터) 등이 16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대일 굴욕외교 중단을 촉구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뉴스1
민주당 대일 굴욕외교대책위원장인 김상희 의원은 이 자리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은 태극기 제조, 소지도 금지했지만, 선조들은 태극기를 독립운동 상징으로 사용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의원들이 먼저 나서서 태극기 흔들기를 결심했으면 좋겠다. 가슴엔 태극기 배지를 달고, 의원실과 상임위원회 회의장엔 태극기를 걸고 대일 외교에 대한 저항 메시지를 전달하자”라고 했습니다.

이날 의총 말미엔 ‘굴욕외교에 맞서 잘 싸워 달라’는 의미로 김 의원이 이재명 대표와 박홍근 원내대표에게 직접 태극기 배지를 달아주는 퍼포먼스도 벌였죠. 잠시 독립운동가들인 줄 착각할 뻔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이 16일 의원총회에서 ‘태극기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이재명 대표에게 직접 태극기 배지를 달아주고 있다. 이 대표는 이 뒤로 국회의원 금배지 대신 태극기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니고 있다. 뉴스1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이 16일 의원총회에서 ‘태극기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이재명 대표에게 직접 태극기 배지를 달아주고 있다. 이 대표는 이 뒤로 국회의원 금배지 대신 태극기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니고 있다. 뉴스1
민주당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 뒤로 일주일 내내 이어졌습니다.

17일 열린 국방위원회에선 민주당 의원들이 자신들의 노트북에 ‘태극기 피켓’을 부착했다가 결국 회의가 파행까지 됐습니다. 민주당 의원들이 의총 때 썼던 ‘역사를 팔아 미래를 살 수 없다’라는 문구와 함께 태극기 팻말을 붙이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이에 반발하며 회의에 불참한 겁니다.

국민의힘 소속인 한기호 국방위원장은 “국회법 145조는 회의장에서 질서를 어지럽힐 경우 위원장이 경고나 제재할 수 있도록 했다”라며 “(태극기 앞에) 써놓은 문구와 국방위가 무슨 관계가 있나. 정치적인 구호”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민주당 소속 위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태극기는 내릴 수 없다”라며 “한 번 건 태극기를 어떻게, 자존심을 내릴 수 있겠나”라고 극렬 항의했습니다. 이들은 회의가 파행된 뒤 기자회견도 열어 “국회의원이 국기를 내거는 게 안 될 행위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같은 당 이수진 원내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국민의힘은) 태극기를 부정하는 것인가. 태극기 앞에서 부끄럽나”라고 비판했습니다.

20일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반복됐죠. 이날도 노트북 위에 태극기 피켓을 내 건 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여당 의원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결국 회의는 개의 6분 만에 정회됐습니다.

문체위 여당 간사인 국민의힘 이용호 의원이 “어떤 이유로도 태극기 자체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활용돼선 안 된다”라고 하자 민주당 임종성 의원은 “태극기가 정치 쟁점화된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하고 처음 듣는 얘기다. 태극기를 국회의원들이 붙였다고 이게 정치적 쟁점이 되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20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노트북에 부착한 태극기 피켓이 논란이 되자 김승수 의원 등 국민의힘 의원들도 뒤늦게 노트북에 태극기를 붙이고 있다.  뉴스1
20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노트북에 부착한 태극기 피켓이 논란이 되자 김승수 의원 등 국민의힘 의원들도 뒤늦게 노트북에 태극기를 붙이고 있다. 뉴스1
20일 오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여야 의원들이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각자의 노트북에 태극기 피켓을 내거는 쪽으로 합의했다. 왼쪽은 국민의힘, 오른쪽은 민주당의 태극기 피켓. 뉴스1
20일 오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여야 의원들이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각자의 노트북에 태극기 피켓을 내거는 쪽으로 합의했다. 왼쪽은 국민의힘, 오른쪽은 민주당의 태극기 피켓. 뉴스1
결국 여야는 간사 간 협의를 거쳐 각자 자신의 발언 시간에만 태극기를 붙이기로 하고 어렵사리 회의를 재개했습니다. 정회 후엔 여당도 이에 질세라 태극기 피켓을 내걸더군요.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은 “민주당 의원님들 덕분에 저희도 태극기를 걸고 상임위를 진행하게 됐다. 구호를 좀 다르게 ‘대한민국 미래를 위한 결단, 여야 함께 합시다’라고 걸었다. 한일 간의 역사적 난제를 풀기 위한 대통령의 결단을 국회가 좀 존중하고 그 과정을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여야는 거의 모든 상임위 회의장에서 ‘태극기 경쟁’을 벌이는 중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2일 오전 서울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대일굴종외교 규탄 태극기 달기 운동 행사에 참석해 ‘역사를 팔아서 미래를 살 수는 없습니다’ 문구가 적힌 태극기 스티커를 자신의 차량에 직접 붙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단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2일 오전 서울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대일굴종외교 규탄 태극기 달기 운동 행사에 참석해 ‘역사를 팔아서 미래를 살 수는 없습니다’ 문구가 적힌 태극기 스티커를 자신의 차량에 직접 붙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단
태극기 사랑에는 요즘 반일 투쟁 최전선에서 뛰고 있는 이재명 대표도 빠질 수 없겠죠!

이 대표는 22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대일굴종외교 규탄 태극기 달기 운동’에 참석해 자신의 차량에 태극기 스티커를 직접 붙이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요즘 윤 대통령을 향한 ‘독설’에 물이 오른 이 대표는 이 자리에서 “다시 대한민국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정부는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을 위한 정부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제 국민이 나설 때다. 태극기를 다시 손에 들고, 각 가정에 계양하고, 차에 붙이고 해서 우리나라가 결코 일본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당당한 자주독립국임을 보여주자”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잠시 일제강점기로 돌아간 줄 알았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이어져 온 민주당의 난데없는 태극기 사랑이 묘하게 불편했습니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우리 모두 어린 시절 한 번쯤은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했던 대한민국 국민 아니겠습니까. 태극기가 민주당의 ‘반일 투쟁’ 행각을 위한 도구로 이용당하는 게 싫은 이유일 겁니다. 태극기가 정치판의 전유물로 전락하는 게 싫었던 거고, 태극기를 든 자신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면 ‘매국노’, ‘친일파’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그 특유의 이분법적 논리가 불쾌했던 거죠. 저 역시 대한민국을 사랑하지만, 민주당식 애국엔 동의하지 않거든요.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도 통화에서 최근 민주당의 ‘태극기 운동’에 대해 “제1야당이 반일 감정을 자극해 어떻게 해보려는 게 정말 한심하다”라고 꼬집더군요. 그는 “당연히 한일 정상회담 과정이나 협상 결과상의 잘못된 부분은 객관적으로 비판하고 지적해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태극기를 모든 곳에 달자고 하고, ‘이완용’, ‘매국노’ 등 감정적 표현을 남발하는 건 국민 여론을 분열시키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으로밖에 안 보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태극기는 이미 ‘태극기 부대’에게 충분히 시달린 것 같습니다. 여론조사업체 한국리서치가 지난해 8월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태극기 부대의 등장 이후 태극기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비율이 35%더군요. 특히 진보층에선 49%가 태극기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응답했습니다.

한국리서치가 지난해 8월 26~29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 대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 한국리서치
한국리서치가 지난해 8월 26~29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 대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 한국리서치
국민의힘이 태극기 부대와의 결별을 선언하자마자 이번엔 민주당이 ‘우리가 이번 기회에 태극기를 빼앗아 오자’라는 상황인 겁니다. 대체 태극기는 무슨 죄인가요.



PS. 온라인상에선 민주당의 태극마크 모양에 대한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공식 태극마크와 달리 태극 문양의 오른쪽 끝이 조금 찌그러졌다는 거죠. 중간에 흰 선 때문에 ‘펩시’ 음료 로고 같다는 말도 나옵니다. 이에 대해 민주당에선 “디자인인데 문제가 되느냐”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입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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