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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정치

두만강을 건넌 10살 소년, 변호사가 되다[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입력 2022-07-31 09:00업데이트 2022-07-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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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살았던 북한 시절을 담담하게 추억하는 임철


임철(33)은 떨리는 심장을 부둥켜안고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았다. 11살 때인 1998년 겨울 두만강을 넘어 탈북한 이후 이렇게 떨렸던 적이 언제 있었나 싶었다.

숨을 깊게 내쉬고 법무부 제11회 변호사시험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런데 서버가 다운돼 접속이 되지 않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임철에겐 이번이 다섯 번째, 즉 마지막 시험 기회였다. 로스쿨 변호사 응시 시험은 5년 내 5회로 제한된다. 앞서 두 차례 시험에서 아쉬운 점수 차로 탈락했는데, 이번까지 떨어지면 그는 법조인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때 카톡 알람이 떴다.

“철아, 합격 축하해.”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놀리는 문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차를 두고 4~5명의 축하 문자가 연속으로 날아왔다.

그제야 임철은 자신이 합격했다는 사실을 서서히 실감할 수 있었다. 마비됐던 서버는 40분이 지나서야 열렸다. 합격자 이름은 가나다순으로 배열돼 있었다.

‘ㅇ’에서 다시 커서를 내려 임철이란 이름을 찾은 순간 쿵쿵대던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임철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3만5000여명 가운데서 두 번째로 변호사 자격을 받았다.

시험 합격 소식이 전해 진 뒤 기자는 임철과 마주 앉았다.

그는 “통일에 이바지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고 싶냐고 거듭 물었다.

“어머니 무덤 찾아야 해요. 묘지를 찾지 못할까봐. 계속 그 생각만 떠올라요….”

울먹울먹하던 임철은 머리를 숙였다.

# 고난의 행군


1990년대 수많은 아사자를 초래한 ‘고난의 행군’ 시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탄광과 광산, 군수공장 종사자들이었다. 도시 사람들은 장사라도 할 수 있었고, 농촌 사람들은 농사라도 지을 수 있었지만, 견장을 달고 엄격한 통제를 받던 광부들과 군부 소속 군수공장 노동자들은 함부로 직장을 이탈할 수 없었다.

함경북도 은덕군(아오지가 위치한 곳)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함경남도 남쪽 금야군의 한 탄광으로 이사해 성장한 임철은 철도 들기 전에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임철의 부친은 석탄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고, 어머니도 함경북도 예술단에서 사회를 보던 예술인 출신이었다. 탄광에서 배급이 나올 땐 임철도 나름 학교도 열심히 다녔고 성적도 우수했다. 세 살 아래 여동생 수련(가명)이도 노래와 춤을 좋아해 온 식구의 귀여움을 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가세는 급격히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탄광에서 배급이 나오지 않자 임철의 부모는 신발 수리소를 차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루 종일 신발을 수리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원정 수리까지 했지만, 그래 봤자 옥수수밥이나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타지에서 살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까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딸의 집을 찾아와 얹혀서 살기 시작했다. 밥상엔 옥수수밥 대신 풀죽이 오르기 시작했고, 이것도 없어 굶을 때가 많아졌다.

임철이 10살 때인 1997년 5월 아버지가 식량을 구해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배낭에 마른 풀떡 몇 개를 넣어주며 배웅했다.

아버지가 없자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엄마 혼자 아무리 열심히 일해 봐야 버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엄마는 신발 수리를 끝낸 뒤 10리 정도 떨어진 탄광에 올라가 석탄을 주어 배낭에 메고 어둑어둑한 저녁에 돌아왔다.

그렇게 모질게 살아갔지만 굶주려 누워 있던 외할아버지는 끝내 눈을 감았다. 젊은 사람들도 먹지 못해 굶어죽는 와중에 힘없고 영양실조까지 온 노인이 더 버티지 못한 것이다.

외할아버지까지 돌아가자 집안에 남자는 10살 밖에 안 되는 임철 하나만 남게 됐다.

먹을 것이 생기면 부모와 자식에게 양보하고, 늘 힘이 없는 모습으로 신발을 수리하고 석탄을 가져오는 엄마를 보다 못해 임철이 나섰다.

“엄마, 제가 석탄을 가져오겠어요.”

엄마는 처음엔 만류했지만, 임철의 고집에 그럼 한번 갔다 오라고 승인했다. 10리길을 걸어서 탄광마을에 도착하자 숱한 사람들이 탄광에서 버린 버력더미에 달라붙어 석탄을 찾아 배낭에 담고 있었다. 임철도 그들 틈에 끼워 열심히 까만 돌을 찾아 배낭에 담고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첫 걸음은 실패였다. 엄마가 말했다. “이건 석탄이 아니란다.”

임철은 다음날 호미를 가지고 다시 탄광으로 올라갔다. 이번엔 진짜 석탄을 찾아 갖고 올 수 있었다. 저녁에 엄마는 빨갛게 벗겨진 아들의 어깨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10대의 임철.


# 엄마의 죽음


가족을 부양할 짐을 걸머진 엄마는 하루 몇 시간도 자지 못하고 계속 일했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원을 찾아가니 ‘늑막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풀죽도 먹기 힘든 집에 약을 살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휴식을 할 수도 없었다. 엄마가 쓰러지면 온 집안이 굶어죽을 판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간 지 얼마 뒤 외할머니도 낮에 누워 있다가 숨을 거두었다. 잘 먹지 못해 결핵으로 사망한 것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갔지만, 임철의 집엔 관을 만들 나무도 없었다. 결국 집 앞의 창고를 허물어 썩은 판자로 가까스로 관을 만들어 할아버지 산소 옆에 묻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간 뒤 엄마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됐다. 식량을 구하려 간다고 떠난 아버지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10살, 7살 밖에 안 된 아들딸을 두고 누워있을 수는 없었던 엄마는 아무리 아파도 계속 나가 일을 해야 했다. 임철도 석탄을 계속 메고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임철을 부르더니 병원에 가서 의사를 불러오라고 시켰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임철은 쏜살같이 병원에 달려가 엄마가 많이 아프니 빨리 집에 좀 와달라고 말하고 다시 혼자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엄마, 엄마 왜 그래”라고 소리쳐봐야 엄마는 손을 힘없이 내저을 뿐이었다. 갑자기 엄마의 손이 축 처졌다. 가쁜 숨소리도 멎었다. 임철과 수련이 엉엉 울며 매달렸지만 엄마는 눈을 뜬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어린 오누이의 울음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러나 이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관을 구하기 위해 온 마을을 헤맸지만, 곳곳에서 죽어나가는 상황이라 관을 구할 수가 없었다. 겨우 썩은 판자들을 다시 구해와 엄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이불을 덮어 안장할 수 있었다. 먹을 것이 없는 동네에서 변변한 제사도 치르지 못하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엄마의 관을 싣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옆에 묻었다. 엄마의 나이는 겨우 30대 중반.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불과 1년 사이에 임철 오누이에게 닥쳐온 운명이었다. 이제 10살과 7살 난 오누이만이 척박한 탄광 마을에 남겨졌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임철



# 탈북


엄마가 돌아가자 먹고 사는 일이 오누이의 어깨로 넘어왔다. 임철은 어린 여동생과 산에 풀을 뜯으려 다녔다. 때로는 둘이 탄광에 올라가 석탄을 캐서 메고 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배고픔을 면하긴 어려웠다. 배고플 때는 동생과 함께 장마당에 나갔다. 옆집 아저씨의 도움으로 집안의 가구들을 하나씩 팔면서 장마당에서 조금의 음식을 구할 수 있었다.

탄광 마을에선 하루가 멀다하게 사람이 죽어나갔다. 임철이 다닌 인민학교 4학년도 인원이 3개 학급에 90명이었지만, 나중에 1개 학급 20명으로 줄었다. 굶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인원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탄광 간부들이 찾아와 집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국가 집이기 때문에 너희는 고아원에 가고 이 집은 바쳐야 한다는 것.

옆집 아저씨가 보다 못해 할머니를 찾으라고 말해주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북중 국경인 함북 새별(경원)에 살고 있었다. 오누이는 어떻게 할아버지를 찾아가야 할지 몰랐다. 옆집 아저씨가 전보를 세 번이나 보냈다.

당시엔 전기 사정도 열악해 새별에서 금야까지 열차가 오려면 닷새 넘게 걸렸다. 열차 안에 들어갈 수 없어 지붕에도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런 어려움에도 전보가 도착했는지, 몇 달 뒤 할머니가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임철은 고향을 떠나기 전 장마당에서 옥수수 국수 한 그릇을 사서 엄마 묘에 올라갔다.

“엄마 잘 있어. 꼭 다시 올게. 기다려. 수련이는 내가 잘 봐줄게.”

그렇게 그들은 할머니 손에 이끌려 고향을 떠났다.

할머니 집이라고 풍족하게 사는 것은 아니었다. 아오지 옆 동네인 경원 역시 탄광마을인데, 할아버지는 신발 수리를 해주고 근근이 먹고 살았다. 임철의 삼촌과 고모들도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새별의 형편 역시 금야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곳에는 아예 학교 다니는 애들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장마당 주변에서 놀다가 기회만 되면 먹을 것을 훔쳐 달아났다. 임철 역시 다시 꽃제비들과 어울리며 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사라졌다가 열흘쯤 지나 다시 나타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임철의 고모가 탈북해 중국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먼 친척도 중국에 산다고 했다.

중국에 다녀온 할아버지는 눈에 띄지 않게 집 재산을 팔기 시작했다. 중국으로 탈북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침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임철 오누이, 중국에 간 고모의 2살 된 딸 현미(가명), 이렇게 5명이 탈북길에 올랐다. 새별 옆을 흐르는 두만강은 너무 깊어 어린 애들이 건너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차로 열 시간 넘게 이동해 강이 비교적 얕은 온성군 삼봉으로 탈북하게 됐다. 마을에서 한꺼번에 빠져나오면 의심을 받을 까봐 기차역까진 따로따로 이동했다.

삼봉에서 미리 강을 건네주기로 약속한 사람 집에 숨어 이틀을 있다가 마침내 두만강에 들어섰다. 아무리 깊지 않다고 해도 11살, 8살 어린 애가 건너기엔 무리가 있었다. 목까지 물이 차오를 때가 있었지만, 임철은 비명을 지르지 않고 견뎌냈다. 현미는 할머니 등에 업혔지만, 수련이는 오빠 손을 잡고 건너야 했다. 모두들 상황을 아는지 이를 악물고 강을 건넜다. 그때는 11월이었다.

강을 건너자 온 몸이 추위로 덜덜 떨렸지만,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앞장서 길을 이끌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마을에 도착하자 할아버지가 여기에 먼 친척이 산다며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밥을 먹는 것이었다. 자라며 구경도 못해 본 쌀밥이 나왔고, 기름진 반찬도 가득했다. 밥을 먹은 뒤 중국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구들에 누우니 지옥에서 천국으로 온 것 같았다.

고려대 법대를 다니던 시절의 임철


# 아버지와의 상봉


아침이 되자 할머니가 말했다.

“철이야, 아버지가 여기로 온다는구나.”

“할머니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왜 여기 있어요?”

하지만 얼마 안 돼 문이 열리더니 웬 사람이 들어왔다. 눈을 비비고 찬찬히 살펴보니 아버지가 맞았다. 정작 만나고 보니 인사만 했을 뿐 눈물은 나지 않았다.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엄마가 돌아간 이야기를 하니 아버지는 너무 슬퍼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식량을 구하러 떠났다가 도무지 구할 방법이 없자 중국에서 돈을 벌어오려고 탈북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숨어 사느라 집과 연락을 하지 못해, 자신이 떠난 뒤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몇 시간 동안 회포를 나누었을까. 아버지가 일어나더니 떠나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국경 부근에 살지 않고 헤이룽장(黑龍江) 어느 농촌에 자리를 잡고 지내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하루 종일 이동했다. 마침내 어느 역전에 내리니 웬 여자가 마중 나왔다. 다가가서 보니 고모였다.

고모는 어린 현미를 보더니 “이게 내 딸이야”라고 물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엄마와 헤어진 현미는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피하기만 했다.

기차에서 내려 다시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어느 집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를 찾았지만 중국에서의 삶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여느 탈북자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살던 곳에서 신분이 들킨 것 같으면 재빨리 다른 집을 구해 이사를 가야 했다. 몇 달에 한번씩 거처를 옮기며 사는 불안한 생활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한국으로 갈 결심을 했다. 하지만 당시엔 한국으로 오는 길이 위조여권을 만들어 취업으로 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열심히 돈을 모았고(어떻게 벌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마침내 위조여권과 취업비자를 마련했다. 임철 일행이 도착한 이듬해 아버지는 마침내 한국으로 갔다. 몇 달간의 조사를 마치고 나온 뒤 아버지는 돈을 마련해 다시 고모의 비자를 만들어 한국으로 데리고 갔다. 고모가 떠나기 전 할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돌아갔다. 할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전 “너희들은 꼭 한국으로 가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제 중국엔 할머니와 임철 오누이, 현미만 남았다.

임철이 서울대 로스쿨 졸업식에서 꽃다발을 안고 사진을 찍었다.


# 한국 도착



2000년 11월 말 마침내 아버지가 한국으로 오는 루트를 찾아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임철 가족 4명은 헤이룽장에서 북중 국경인 투먼(圖們)까지 다시 기차를 타고 갔다. 거기엔 이미 많은 탈북민이 한국으로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는데, 임철 일행까지 포함해 모두 15명이었다.

투먼에서 일행은 기차를 타고 베이징(北京)으로 떠났다. 베이징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몽골 국경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다른 탈북민들이 합세해 몽골 국경에 내렸을 땐 모두 20명이나 됐다. 당시엔 탈북민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통로가 없을 때였다. 그러다가 이즈음부터 몽골을 통해 한국으로 오는 통로가 최초로 개통됐다. 나중에 동남아 쪽으로 탈북 루트가 개척됐는데, 2008년까지도 몽골을 통해 오는 탈북민이 많았다. 임철 일행은 몽골을 통해 한국에 온 최초의 탈북민들에 속했다고 할 수 있었다.

임철 일행은 추운 12월의 어느 밤 철조망 5개를 넘어 몽골로 넘어갔다. 사막을 헤매다가 불빛을 발견했을 때 군인들이 다가왔다. 이들은 감옥에 수감됐다. 며칠 동안 감옥생활을 한 끝에 버스 2대가 와서 이들을 태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몽골 군인들이 중국에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닌가. 나중엔 몽골 국경경비대도 지침을 받아 국경을 넘어 온 탈북민은 수도로 보냈는데,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탈북민 처리 방침이 없었던 듯 하다.

끌려 나가는 탈북민들은 통곡을 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중국에 도착해 중국 군인들에게 인계됐을 때 실신하는 사람도 나왔다. 중국에서 체포되면 북송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기적이 일어났다. 한 중국군 장교가 오더니 “당신들이 잡혀 가면 감옥에 가는 걸 뻔히 아는데, 왜 보내겠냐.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는 탈북민을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교의 약속은 사실이었다. 중국군 호송차에 일행을 태우고 기차역으로 가더니 가겠다고 말하는 지역까지 차표까지 끊어주었던 것이다. 임철의 가족은 장춘(長春)으로 갔다. 거기서 다시 아버지가 소개한 사람을 만나 투먼으로 갔다. 한 달 만에 떠난 곳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투먼도 안전하지 못해 그 옆 훈춘(琿春)으로 가서 숨어 2001년 설날을 맞았다.

설 다음날 집에 누군가가 왔다. 그는 앞서 몽골로 가다 체포돼 뿔뿔이 흩어졌던 일행이 다시 몽골로 들어가 이번엔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고 알려주었다. 용기를 얻은 임철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섰다. 지난번처럼 투먼에서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해 몽골 국경까지 가는 코스였다. 베이징에 도착하자 지난번에 안내해 준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 일행은 모두 11명. 다섯 개의 철조망을 헤치고 몽골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군인들에게 체포됐다. 이번엔 묶지도 않고 눈을 싸매지도 않았다. 호송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이번에도 중국으로 보낼지 몰라 몹시 조마조마했지만, 다행이 이번엔 울란바토르로 향했다. 이곳에서 임철 일행은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2001년 1월 13살 임철은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당시 한국의 한 월간지에 소개돼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한국에 도착한 직후의 임철·수련 오누이와 사촌동생 현미(가운데)


# “법을 공부해야겠다.”


합심 조사는 석 달이나 걸렸다. 이후 다시 3개월의 하나원 생활을 거쳐 임철은 2001년 7월 사회에 나왔다. 마침내 서울 양천에 아버지와 함께 식구가 모여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임철은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갈 나이이지만,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6학년에 입학했다. 거기서 반 년 정도 공부한 뒤 중학교 과정은 검정고시를 쳐서 통과했다. 2003년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2006년 재외국민 특별전형으로 고려대 법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왜 법대를 선택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북한의 사회제도 때문에 엄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해요. 제도를 바꾸어야 사람이 살 수 있는데, 제도를 어떻게 바꿀까 생각해보니 법대가 떠올랐어요. 법치주의를 세워야 독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있지 않을까요.”

대학 과정은 쉽지 않았다. 도중에 방황하던 기간도 있었고, 휴학도 했고, 알바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또 사법고시를 보기 위해 1년 정도 대학을 다니지 않아 2013년 8월에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3년 더 대학을 다닌 것이다.

2008년 로스쿨이 도입됐지만, 거기에 갈 돈이 없었다. 법조인이 되려면 사시를 통과해야 되는 줄만 알았다. 2012년쯤 되니 로스쿨에도 각종 장학제도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목표를 사시에서 로스쿨로 변경했고,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2014년 서울대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었다. 로스쿨에 입학하여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여정도 결코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로스쿨의 장학금 제도가 잘 되어 있었고 교수님들의 관심과 지도가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졸업 후 변호사 시험에 쉽게 통과하지 못하면서 임철의 자신감은 점점 떨어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변호사 시험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해가 갈수록 시험에 붙는 확률도 낮아졌다.

연거푸 시험에서 떨어져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옆에서 힘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대 법대 졸업생 멘토들은 낙방할 때마다 보양식을 사주면서 다음에는 꼭 합격할 거라고 힘을 북돋아 주었다.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북하나재단을 비롯한 여러 재단들의 교재비 등 수험료 지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2022년 11회 로스쿨은 임철에게 마지막 기회였다. 로스쿨 졸업생 3400명이 시험을 쳐서 절반 정도인 1700명이 변호사 자격을 받았다. 그중엔 임철도 포함됐다. 그는 한국 사회의 뜻있는 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지원이 있었기에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임철은 변호사 시험 통과 후 서울 서초의 한 법무법인에서 수습 기간을 밟고 있다가 최근 서울대 공익법률센터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사회 소수자들의 법적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다. 특히 앞으로 다가올 통일을 대비하기 위한 통일법의 연구와 탈북민들의 법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저희는 무사히 한국에 왔지만, 지금도 중국에는 많은 탈북민이 코로나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고 숨어살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난민 지위를 받으면 저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법조인이 됐으니 앞으로 탈북민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 또 김정은 체제가 붕괴된 뒤에 북한 법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도 연구할 생각입니다.”

변호사 시험 공부를 하는 임철


# 마음에 묻은 엄마


임철과 함께 입국한 수련이도 연세대를 나와 한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다. 동생을 생각하면 항상 7살 때 손을 잡고 두만강을 넘던 일이 떠오른다.

옛날 북한에서 함께 공부하던 탄광마을 동창들, 배고파서 학교도 다닐 수 없었던 그들은 그 엄혹한 고난의 행군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북한에서 성공할 수가 없는 출신이다. 탈북한 아버지 덕분에 서울에 와서 변호사까지 된 임철은 단연 그들 중 가장 성공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묻을 관조차 없어 서럽게 울던 탄광마을 어린 소년이 서울에서 변호사가 됐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충분히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임철은 한국에 와서 행복했던 순간으로 고려대에 입학했을 때, 로스쿨에 붙었을 때, 변호사 시험에 붙었을 때를 꼽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겨우 33살 청년일 뿐이다. 앞으로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날, 가장 기쁜 순간에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음에 묻은 엄마 생각이다. 그토록 고왔다는 엄마는 지옥의 땅에서 태어난 죄로 지금의 임철의 나이에 꽃다운 삶을 마감해야 했다. 10살, 7살 오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날 때 엄마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이제 임철은 그 심정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엄마 묘지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떠날 때가 벌써 23년 전입니다.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 지금쯤 흔적이라도 남아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고향에 돌아가는 날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은 항상 엄마 묘에 가 있어요.”

몸은 서울에 살고 있지만, 임철의 마음은 여전히 11살 때 벗어난 지옥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에 머물고 있다. 그 땅에서 태어난 죄로 그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굴레는 아닐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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