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용관]공천 자격시험

정용관 논설위원 입력 2021-06-15 03:00수정 2021-06-1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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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Secret Garden)…. 정치학에선 공천을 이렇게 묘사한다. 오랜 역사의 서구 정당들도 공천 과정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점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너무 점잖은 것 같다. 특정 소수가 공천권을 마음대로 행사하거나 계파 나눠먹기, 줄 세우기가 횡행해온 우리 정치판에선 차라리 ‘살생(殺生)의 화원’ 정도가 더 적확한 표현 아닐까 싶다.

▷이런 공직 후보자 선출 과정에 한국 정당사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방식이 도입될지도 모른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공천 자격시험’을 내년 지방선거 때부터 적용하겠다고 밝힌 것. 이 대표는 “공천을 받으려면 기초적인 자료해석 능력, 표현 능력, 컴퓨터 활용 능력, 독해 능력 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해 왔다. 국가직무능력표준(NCS)과 비슷한 자격을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일부 아프리카 나라 정당이 “교육 수준 미달 및 문맹인 자는 후보 자격이 없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고 하지만, 직무 능력을 테스트하는 공천 자격시험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NCS는 National Competency Standards의 약자. 산업현장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지식, 기술, 태도)을 국가가 표준화한 것이다. 취업준비생들의 필수 코스다. 이를 원용해 공직 후보자가 갖춰야 할 기본 능력에 대한 문항을 설계해 필기와 실기를 치르도록 하겠다는 게 이 대표 구상이다. 다만, 성적순이 아니라 운전면허 시험처럼 커트라인만 통과하면 된다는 것. 서너 차례 응시 기회를 주고 그래도 통과하지 못하면 공천에서 배제한다는 얘기다. 현직 단체장이 다시 출마하는 경우에도 예외 없이 시험을 봐야 한다. 컴퓨터 활용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의 ‘컴맹’ 후보들 사이에선 당장 “정치와 컴퓨터 시험이 뭔 상관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이 대표는 일단 자질 논란이 끊이질 않는 지방의원 등을 정조준한 것으로 보인다. 공적 역할을 하기보다는 지역 유지로 행세하기 위해 지역 국회의원이나 당협위원장에 줄을 대 공천을 받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을 걸러내고 젊을 때부터 정치권에 진입할 의지가 있는 2030세대에게 길을 터주자는 취지라면 이 대표가 주창한 공천 자격시험 논의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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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시험이라는 용어가 거부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해 서울과학고를 거쳐 미 하버드대를 졸업한 이 대표의 ‘실력 지상주의’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적지 않다. 정의당에선 “시험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반론이 나온다. 그럼에도 이 대표의 발상은 관심을 끌 만하다.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되든, 지금까지 해오던 관행 그대로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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