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선한 의지’와 문재인의 ‘착한 대통령’ 신드롬[최영해의 폴리코노미]

최영해 기자 입력 2021-04-18 09:00수정 2021-04-18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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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대통령이 시장에선 ‘악한(惡漢)’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지난 달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발언은 대통령의 ‘선한 의지’가 읽힌다. 비록 시장에서는 “대통령이 시장경제 논리를 모르는 게 아니냐”는 질타가 쏟아져 나왔지만, 대통령의 본심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여민1관에서 정부 서울·세종청사와 연결된 영상회의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신용이 높은 사람은 낮은 이율을 적용 받고, 경제적으로 어려워 신용이 낮은 사람들이 높은 이율을 적용 받는 것은 구조적 모순”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신용자들이 불법 사(私)금융 등에 내몰리지 않도록 더욱 형평성 있는 금융 구조로 개선되게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신용 등급이 높은 사람이 금융회사에서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선 기본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이를 구조적 모순으로 본 것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게 진짜 대통령이 한 말이냐”며 깜짝 놀란 반응이 잇따랐다. 이를 브리핑했던 청와대 한 부대변인은 “대통령 말을 너무 압축하다 보니 부연 설명이 없었다. 오해였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시장에선 이를 곧이곧대로 듣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 더욱이 청와대 공식 브리핑이 아니라 부대변인의 개인 페이스북에 올렸으니 대통령 발언의 진의를 두고 논란이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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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달 30일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 정부세종청사에서 화상 연결 방식으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冒頭) 발언을 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저신용자가 높은 금리를 적용 받는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지시해 논란을 빚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강남 불패(不敗)면 대통령도 불패’라던 노무현 전 대통령
문 대통령의 이 발언은 참여정부 시절 ‘강남 부동산과 전쟁’을 벌였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후 강남 집값이 고공행진을 거듭하자 ‘투기 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취임 첫해인 2003년 가을 “강남 불패(不敗), 강남 불패하는데, 그러면 대통령도 불패다”고 선언했다. 강남 집값과의 전면전에 대통령이 나선 것이다. 하지만 전면전을 비웃기라도 하듯 강남 집값은 더욱 꿈틀거렸다.

고집이 센 그의 발언 또한 더욱 강경해졌다. “투기와의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부동산 정책에 ‘올인’하겠다….” 심지어 공무원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중앙부처 국장급 이상 간부들이 강남에 아파트를 사도록 놔둬선 안 된다는 극한 대책까지 거론되기도 했지만, 강남 집값은 대통령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국가의 녹(錄)을 먹는 고위 공무원이라고 해서 ‘거주의 자유’를 박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발언하는 모습. 정부서울청사와 세종청사가 화상으로 연결돼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 전 대통령의 “금리 초과 투기 소득 환수” 발언
‘강남 집값과의 전쟁’에 대통령이 앞장서도 강남 아파트 값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노 대통령은 급기야 ‘은행 금리’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2003년 10월 29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경제민생 점검회의에서였다. 노 대통령은 “부동산 투기를 통한 금리소득 이상의 초과 소득에 대해 양도소득세와 보유세를 매겨 전액 과세로 환수할 수 있다는 자세로 정부의 의지를 다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이런 발언이 공개되자 시장에선 ‘뜨악’하는 반응이 잇따랐다. 아무리 강남 집값을 잡는 것이 대통령의 절체절명의 과제라고 해도 은행 금리 이상의 소득을 박탈하려는 것은 사회주의적 발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리스크가 전혀 없는 은행 금리와 고위험 자산인 부동산 수익률과 똑 같게 하자는 것은 국가개입주의 논리였다. 시장경제 원리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논리였다.

부동산에서 나오는 수익이 은행 이자 보다 많다고 국가가 세금으로 환수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적 발상에 다름없었다. 위험이 거의 없는 은행 예금과 고위험 고수익 자산인 부동산이 똑같은 수익을 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경제학의 기초에 어긋난다. 노 대통령의 발언 이후 대학교수나 연구원, 부동산 전문가들의 비판이 잇따랐고, 심지어 전직 고위 경제 관료들조차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비판에 가세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인 2008년 1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언론 브리핑 전 정책 참모 스크린 거치는데도…
노 대통령의 이런 극단적인 발언은 어떻게 공개된 것일까?

사실 노 대통령의 ‘부동산에서 은행금리 이상의 수익이 나도록 놔둬선 안 된다’는 얘기는 청와대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여러 차례 나왔던 말이었다. 부동산을 잡겠다는 대통령의 뜻이 워낙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이런 발언이 언론에 그대로 공개되지는 않았다. 위험 자산인 부동산의 수익률과 안정 자산인 은행 예금의 금리를 동일시하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이요,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기 때문이다. 국무회의나 청와대 회의에서 대통령 발언은 공개되기 전에 참모들의 스크린을 거치는 과정을 밟는다.

노 대통령이 회의에서 수시로 이런 발언을 하면서 강남 집값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은행 금리’ 운운하는 발언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공개되기 전에 삭제됐다. 정부 경제부처에서 파견된 대통령정책실의 참모들은 대통령 발언이 언론에 공개되기 전 불필요한 논란이나 오해의 소지가 될 발언을 고치거나 다듬었다. 그런데 그동안 청와대 회의록을 점검하던 한 정책 참모가 갑자기 휴가를 가는 바람에 대통령의 발언이 고스란히 공개되고 만 것이었다. 청와대에서 정책에 정통한 참모들이 대통령을 어떻게 보좌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을 만하다. 문재인 정부에선 애초 이런 기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담당자가 휴가라도 떠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참여정부 출범 첫해인 2003년 4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노무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민정수석비서관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노 대통령 뒤에 문희상 대통령비서실장의 모습이 보인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대통령의 선한 의도가 시장선 ‘악한 정책’ 되기도
노 전 대통령의 ‘부동산 수익과 은행 금리’ 발언과 문 대통령의 ‘저신용자의 금리’ 발언을 보면 맥락이 닿아 있는 접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대통령의 ‘선(善)한 의지’다. 이른바 착한 대통령 ‘환상(幻像)’이다. ‘부동산 투기한 사람들의 수익을 환수해 은행 금리 이상 수익을 못 내게 하자’는 것이나, ‘신용 등급이 낮아 은행에서 높은 대출 금리를 물어야 하는 구조적인 모순을 없애자’는 발상은 부동산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자와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는 금융 소외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이른바 ‘포용(包容)금융의 정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부동산 투기로 어떤 육체적 노동도 없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는 불로소득(不勞所得)을 뿌리 뽑고, 신용이 낮아 은행을 이용하지 못해 고금리의 불법 사(私)금융으로 내몰리는 한계선상의 금융 이용자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은 공감할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대통령이 나서 부동산 투자 수익과 은행 금리를 동일 수준으로 설정하거나 저신용자들이 높은 금리를 물어야 하는 현실을 바꾸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철학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식의 정책을 지금 한국 사회에 적용하려 들다가는 100전 100패일 것이다. 자유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의지가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관철할 수 없는 시장의 논리다. 자유시장 경제를 사회주의 경제 체제로 바꾸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다. ‘착한 대통령’ 프레임으로는 시장경제에서 벌어지는 복잡다단한 현상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2006년 2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열린 부동산정책회의 모습. 동아일보DB


●‘착한 대통령’ 프레임과 시장에서의 결과는
임기 5년차, 문재인 대통령은 그동안 ‘착한 대통령’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지적을 낳고 있다. 정부 출범과 함께 경제 정책으로 내세웠던, 근로자의 임금을 올려 소비를 늘리면서 경제 성장을 견인하자는 ‘소득주도 성장’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참담한 실패에 가까운 정책으로 기록되고 있다.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으로 문 대통령의 의도대로 살림살이가 나아진 노동자가 있는 반면, 이를 견디지 못해 문을 닫은 자영업자도 넘쳐났다.

그나마 가게를 유지하려면 추가 고용은커녕 있던 사람마저 잘라내야 했다. 문 대통령의 선한 정책이 역으로 수혜를 입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에게 화살로 돌아온 셈이다.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은 박정희 전두환 군부 정권 시절 ‘임금 인상’을 외치며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 노동자들 편에 서 데모를 하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면회하고, 변호를 자처했다. 그러니 홍장표 같은 변형윤의 제자 ‘학현학파’를 중용하고 정책 실험까지 허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다. 최저 생계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보다는 1억원 가까운 연봉을 받는 고임금 근로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진 상황이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 설치된 일자리상황판 앞에서 참모들에게 일자리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 이후 일자리 상황이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이 모습이 연출된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청와대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만들어 놓고, 청와대에 일자리위원회를 만들면서 일자리위원장까지 대통령이 겸임했을 정도다. 대통령이 매일 체크한다는 일자리 상황판은 지금 어떻게 돼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근로자의 임금 인상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끌어보겠다는 이른 바 '소득주도성장'을 신앙처럼 받들던 홍장표를 문재인 정부 출범 첫해 경제수석으로 임명해 실험을 했지만 성과는 참담했다. 그럼에도 바로 내치기 어려워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까지 청와대에 만들어 소득주도 성장 논리가 허구가 아님을 입증하려고 했다. 하지만 청년 일자리는 더욱 메말라갔고, 자영업자들의 한숨 소리는 높아만 간다.


●‘실패한 소주성’ 주역 홍장표를 KDI 원장에?
노 전 대통령은 사실 진보라기보다는 실용주의에 가까웠다. 입으로는 진보를 지향했지만 최종 선택지는 어떻든 국리민복(國利民福)에 있었다. 마음속으론 부동산 투기 이득을 영혼까지 탈탈 털고 싶었겠지만 대통령이라도 그런 반(反)시장적인 정책을 펼치기는 어려웠다. 김영삼 정부 때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위기를 맞아 IMF(국제통화기금)가 극약 처방한 것은 혹독한 시장경제 논리의 강요였다. 수많은 국민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선한 의지(good will)’로는 노 대통령과 빼닮았다.


하지만 아무리 대통령의 자리라도 고신용자에게 낮은 금리를, 저신용자에게 높은 금리를 매기는 은행 영업의 원리를 거스르기는 어렵다. 이를 구조적 모순이라고 하는 말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세상 물정’을 모르는 대통령이 된다. 영리를 추구하고 주주 이익이 목표인 은행의 경영 원리에 맞지 않다는 것은 중·고등학생이라도 아는 얘기다.

2017년 12월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과 홍장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문재인 정부의 이른바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주도했으나 실적이 좋지 않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착한’ 대통령이 내걸었던 소득주도 성장은 지금 낙제점을 면하기 어려운 초라한 성적표를 받고 있다. 이를 주창했던 홍장표나 장하성 같은 학자들은 “성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변해왔지만, 5년 임기 대통령에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문 대통령이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아직도 떨치지 못하고 홍장표 같은 실패한 학자를 나라의 미래를 걸머진 국가대표 싱크탱크인 KDI(한국개발연구원) 원장에 대못으로 박아놓는다면 자칫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선한 의도로 했다고 해도 시장에서 오히려 악한으로 비쳐진다면 다시 돌아봐야 한다. ‘착한 대통령’ 프레임은 한번의 실패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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