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내가 지킨다” 부상 병사 5명 부대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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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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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포격 1년… 연평부대 가다

소나무에 박힌 故서정우 하사의 모표 지난해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숨진 서정우 하사의 해병대 모표 (모자에 붙이는 마크)가 인근 소나무에 깊이 박혀 있다. 해병대 모표는 독수리, 별, 닻으로 구성돼 있다. 서 하사의 모표는 그날의 피격을 보여주듯 닻이 사라진 채 발견됐다. 해병대 제공
소나무에 박힌 故서정우 하사의 모표 지난해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숨진 서정우 하사의 해병대 모표 (모자에 붙이는 마크)가 인근 소나무에 깊이 박혀 있다. 해병대 모표는 독수리, 별, 닻으로 구성돼 있다. 서 하사의 모표는 그날의 피격을 보여주듯 닻이 사라진 채 발견됐다. 해병대 제공
“지난해 11월 23일 북한의 포격 도발 이후에도 16일간이나 K-9 자주포 안에서 전투태세로 대기했어요. 날씨는 추웠죠. 잠도 자주포 안에서 자고 매일 전투식량을 먹었습니다. 그게 더 힘들었죠.”

인천 옹진군 연평도 해병2사단 연평부대 7중대에서 만난 김정수 대위(30)는 “당일 아침에도 부대원에게 북한의 도발이 있을 수 있다고 교육했는데 ‘설마’ 하는 마음도 있었다”며 1년 전을 떠올렸다. 김 대위는 북한에 유일하게 대응사격을 한 7중대장이었다.

그날은 대대전술훈련평가로 사격훈련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쾅’ 하는 파열음이 주둔지 쪽에서 들렸다. 김 대위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갔다. 분명히 뭔가 왔다. 우리 것이 아니었다. 상부에 보고한 뒤 대응사격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한 포반(분대)은 분명히 장비 파손과 대원 부상으로 사격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격 준비 끝’을 외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사격 도중 통신이 끊어진 포반에는 복구조를 투입했다. 포탄이 날아오는 상황이었으나 통신병은 유선을 개통시켰고 대원들을 포 밖으로 유도했다.

그럼에도 대응사격까지 걸린 13분을 두고 ‘지각대응’ 논란이 일었을 때 모든 대원은 참담한 심경이었다고 한다. 포술 담당 김상혁 중사(33)는 “한마디로 억울했다. 이후 ‘한 번만 더 건드려 봐라. 이번엔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각오가 있었다”고 말했다.

연평부대는 이후 시설을 모두 정비했다. 전방 25km 앞까지 감시할 수 있는 고성능 감시카메라를 북한 방향으로 설치했다. 시야를 가렸던 포상 타이어는 없앴다. 나무도 벴다. 그러나 파편을 맞은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포상에는 화염에 그을린 흔적, 포탄과 파편 자국이 그대로였다. 복구되지 않은 벽도 많았다.

당시 부상을 당한 16명 중 8명은 전역했다. 나머지 8명 중 5명은 본인 희망에 따라 부대로 돌아왔다. 얼굴을 다친 한규동 병장(21)은 “군병원에서 치료받은 뒤 복귀하겠다고 하자 부모님이 말렸다. 설득해 가까스로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한 병장(21)은 양쪽 볼과 왼쪽 다리에 파편을 맞았다. 그는 “한 번 죽다 살았는데 다음에는 쉽게 안 죽을 것 같다. 덤으로 얻은 목숨”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23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김황식 국무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연평도 전사자 1주기 추모식을 연다. 국방부는 21∼25일을 전군 추모기간으로 정하고 전 부대에 ‘북한의 도발을 잊지 말자’는 내용의 현수막이나 전광판을 설치했다.

연평도=이유종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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