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과 소통 강조한 이한동 前국무총리 별세

최우열 기자 입력 2021-05-08 16:03수정 2021-05-0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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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동 전 국무총리.
내무부 장관, 한나라당 대표, 자유민주연합 총재 등을 지낸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이 전 총리는 격랑의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여야와 보혁 간 소통과 통합을 추구했던 대표적인 정치 원로다.

● 판사, 검사 거쳐 6선 정치인으로
고인은 1934년 경기 포천군 군내면 명산리에서 8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포천에서 초등학교까지 졸업한 뒤 상경했다. 이후 경복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당시 친분이 있던 학교 동기는 “성격이 시원시원하면서도 배려심이 많아 누구나 좋아했던 친구”라고 기억했다.

대학 졸업 직후 고향으로 돌아간 고인은 본격적으로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해 군 복무 중 합격했다. 제대 이후 1963년 서울지법 판사로 법조인의 길을 시작했다. 5개월 동안 변호사 생활을 한 뒤 1969년 검찰로 옮긴 고인은 법무부 법무실 검사,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서울지검 특수1부장·형사1부장을 지냈다.

국무총리를 지낼 당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고인은 “판사, 검사, 변호사를 다 해보며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사명감이 투철하고 열정적이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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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검사장 진급을 눈앞에 두고 정계 입문 권유를 받았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모험을 선택했다. 1981년 고향인 포천에서 11대 국회의원으로 처음 국회에 입성한 고인은 16대까지 내리 6선에 성공했다.

● “정치색 따지기에 앞서 국민 마음부터 읽으라”
그는 원내총무(현 원내대표)·사무총장·정책위의장 등 당 3역을 두루 지낸 흔치않은 기록을 갖고 있다. 노태우 정부 시절엔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는 민주화 등 정치·사회·경제적 격변의 시기였다. 그 자신도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말할 정도로 변화가 많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보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에서는 민자당 원내총무,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명 원내총무’로 불렸던 고인의 역량은 난마처럼 복잡하게 얽힌 정치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아무리 어려운 협상에서도 대화를 통해 타협을 이끌어내 여야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이한동 총무학’이란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입법 ·행정·사법 영역에서 출중한 경험을 쌓았던 고인은 오랫동안 ‘준비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1997년 대선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협상과 통합의 정치인이었지만 주요 이슈를 놓고서는 과단성 있는 결정으로 정치력을 발휘했다. 당시 고인의 별명은 ‘단칼’. 협상할 때는 하더라도 중요한 결정 앞에서는 맺고 끊음이 분명해 붙여진 것이다.

고인은 1999년 한나라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 총재로 활동했다. 그리고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김대중 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냈다.

고인은 2018년 발간한 회고록 ‘정치는 중업(重業)이다’에서 통합과 대화의 정치를 강조했다. 평생의 좌우명이 ‘해불양수(海不讓水·바다는 어떤 물도 거부하지 않는다)’일 정도로 통합의 정치를 강조해 온 고인은 자신의 정치 역정을 정리한 이 책에서 “정치는 국사를 조직하고 이끄는 최고의 업”이라고 했다. 또 끊임없이 민심을 읽고 대화할 것을 강조했다.

이 전 총리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 자신에게 정치적 조언을 구하러 찾아온 후배 정치인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항상 자신의 정치색을 따지기에 앞서 국민의 마음부터 읽으라.”

유족은 부인 조남숙 여사와 아들 이용모 건국대 행정학과 교수, 딸 지원 정원, 사위 허태수 GS그룹 회장과 김재호 동아일보·채널A 사장, 며느리 문지순 동덕여대 영어과 교수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광진구 건국대병원 장례식장 202호실(02-2030-7902), 발인은 11일 오전 6시다.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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