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뜻을 널리 밝히노라

조종엽 기자 입력 2020-04-01 03:00수정 2020-04-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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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현대 문장으로 바꾼 동아일보 창간사>

푸른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드넓은 대지에 맑은 바람이 불도다. 산하엔 초목이 무성하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며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힘차게 뛰어오르니 천하 만물에 생명과 광명이 충만하도다.

동방의 무궁화동산, 2000만 조선 민중은 새로운 공기에서 호흡하며 새로운 빛을 목도하노라. 이는 실로 살아 있음이고 부활이다. 혼신의 힘으로 저 먼 길을 가고자 함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의 발달이다.

세계 인류의 운명은 지금 일대 전환점을 맞았도다. 차르 황제나 카이저 황제 같은 구시대의 발상은 떠나가고, 자본의 탐욕은 신성한 노동의 도전에 직면했으며, 무력에 기초한 침략주의 제국주의는 평화 정의 인도주의에 길을 내주는 형국이다. 인민 노동 정의에서 비롯된 자유정치 문화창조 민족연맹이 우리 앞에 신세계를 펼쳐 보이도다.

우리는 몽상가가 아니라,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찌 하늘과 이상만 바라보고 이 땅과 현실을 망각하리오. 세계의 대세를 있는 그대로 논하고자 함이니, 한쪽엔 새로운 세력이 있고 또 한쪽엔 이와 대립하는 구세력이 있어 서로 투쟁하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해방과 개혁의 운동이 있는가 하면 이를 억압하려는 움직임이 분명 존재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아, 신구의 충돌과 진보 보수의 다툼이 어찌 이 시대에만 있는 일일까. 그건 인류 역사 어느 시대에도 늘 있어 온 일이었다.

주요기사
추위가 가고 볕이 다시 드니, 쌓인 눈과 단단한 얼음이 녹고 온갖 만물이 하나둘 다시 살아나도다. 이는 분명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 의연한 봄의 전령을 누가 감히 거부할 것인가. 신구의 충돌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북소리를 울려 옛 시대의 몰락을 알리는 것이다. 저 도도한 흐름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새로운 시대가 분명 승리할 것이다.

물론, 이미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새로운 세계가 벌써 전개되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투쟁과 진통을 거쳐 저 멀리 수평선에 신문명의 웅대한 한 자락과 신시대의 서광 한 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도다. 자 보라, 서광 한 자락을 위해 수천만 민중이 하나같이 모두 몸부림치고 있음을.

이러한 시대에 동아일보가 태어났도다. 아, 동아일보 창간을 어찌 우연이라 할 것인가. 돌아보건대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지 10년, 그 사이에 조선 민중은 일대 악몽의 늪에 빠져야 했다. 조선 민중은 그 또한 사람인지라 어찌 사상과 희망이 없었을까만 그것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 또한 사회인지라 어찌 집단적 의사 표현의 충동이 없었을까만 능히 이뤄내지 못했다. 그 또한 민족인지라 어찌 고유한 문명의 특장과 생명의 미묘함이 없었을까만 그것을 드러내지 못했다. 부르짖고 싶어도 부르짖을 수 없었고, 달음질치고 싶어도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지난 10년, 2000만 조선 민중은 그렇게 악몽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곳은 바로 사지(死地)였고 함정이었다. 자유가 사라져 발전을 기약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조선 민중은 실로 고통스러웠다. 혹은 울고 혹은 노하였다. 그 분노, 어찌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만의 분노일 것인가. 조선 민중의 삶은 늘 이 땅의 역사와 함께했으니, 4000년 역사적 생명까지 모두 분개하도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언론의 자유가 다소 용인된다고 하니, 조선 민중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그것을 전달해주는 친구를 열망하고 기대하고 있다. 이에 동아일보가 세상에 태어났으니 그것을 어찌 우연이라 말할 수 있으리오. 실로 민주의 열망과 시대의 동력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에 그 뜻을 선명하게 밝힘으로써 창간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1.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소수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특권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2000만 민중 전체의 기관으로 자임한다. 그 민중의 의사와 이상과 목표와 희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보도할 것을 약속하노라.

2.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이는 국체(國體)나 정체(政體)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삶의 원리이자 정신을 의미한다. 무력을 배척하고 개인의 인격에 기초한 권리와 의미를 주장한다. 따라서 국내 정치에서는 자유주의요, 국제 정치에서는 연맹주의다. 사회생활에서는 평등주의요, 경제에서는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다. 특히 동아시아에 있어선 각 민족의 권리를 인정하며 친목과 단결을 추구한다. 전 세계에 있어서는 정의와 인도를 승인하고 평화를 추구한다. 다시 말하건대, 폭력과 무력을 거부하고 양심을 존중함으로써 삶의 다양한 관계를 규율코자 함이니, 옛 왕도의 정신이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만천하 백성들의 경복(慶福)과 광영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3.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삶을 충실하고 풍부하게 하기 위함이다. 곧 부를 증진하고, 정치를 완성하고, 도덕을 순수하게 하고, 종교를 풍요롭게 하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철학과 예술을 심원하고 오묘하게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선 민중이 세계 문명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고 삼천리강산을 문화의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니, 이는 곧 우리 조선 민족의 사명이요 생존의 가치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동아일보는 태양의 무궁한 광명과 우주의 무한한 생명을 삼천리강산, 2000만 민중 속에서 실현하고 나아가 자유의 발달에 이르고자 한다. 그리하여 1) 조선 민중이 각자의 인성과 천명을 바르게 하고, 서로 화합하는 문화를 수립하도록 하고 2) 조선 민중이 자신의 위치에서 차별 없이 일대 낙원을 건설하는 데 힘을 모으도록 하는 것이 동아일보 창간의 근본적인 취지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앞날은 심히 험난하도다. 그 운명을 과연 누가 예측할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오직 조선 민중의 동지로서, 그들과 더불어 생사 진퇴를 함께하기를 약속하노라.


▼ “창간호 받아쥔 서울시민 ‘동아일보 만세’ 외쳐” ▼

사장 지낸 국어학자 이희승 회고


1920년 4월 1일 발행된 동아일보 창간호 1면. 동아일보DB
“동아일보야, 너는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이다. 권리보호자이다. 문화소개자이다. 조선 민중의 기관수며 우편배달부며….”

동아일보 창간호 1면에 창간사와 함께 실린 논설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의 한 대목이다. 필자는 ‘황성신문’을 창간해 독립정신을 고취했던 언론인 석농 유근(1861∼1921). ‘동아일보’라는 제호도 그가 제안했다. 동아일보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던 양기탁(1871∼1938)과 유근을 창간 편집감독(고문)으로 모셔 조선 말기 민간신문의 애국계몽 전통을 이었다.

3·1운동의 흥분이 가시지 않았던 1920년 민족의 자강 없이 독립은 없다는 선각자들이 민족의 구심점으로 동아일보를 탄생시켰다. 3·1운동 1주년이 되는 날 창간호를 내고자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4월 1일이 창간일이 됐다. 3·1운동 민족대표로 투옥된 인사들이 나중에 동아일보에서 일할 수 있도록 창간 당시 임직원의 일부 자리를 비워 뒀다. 대표적 인물이 고하 송진우(1890∼1945)다. 그는 출옥 이듬해인 1921년 3대 사장으로 합류했다.

창간 당시 기자들은 당대의 준재(俊才)들이었다. 장덕준 기자(1892∼1920)는 간도참변을 취재하러 떠났다가 일제에 의해 피살된 독립운동가다. 한기악 기자(1898∼1941)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 막 귀국한 길이었다. 일본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려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염상섭 기자(1897∼1963)는 오사카에서 본보 기자로 발령됐다. 한국 언론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유학파 김동성(1890∼1969),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1886∼1965) 등도 창간 기자였다.

전국 팔도의 민심을 하나로 모은다는 취지에서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금(株金)을 모집했으나 가뭄과 불황으로 매우 어려웠다. 그 난관을 헤치고 발기인으로 최준(1884∼1970), 안희제(1885∼1943)를 비롯한 각 도의 애국인사와 유지를 망라했다. 사옥은 중앙학교 교사(校舍)로 쓰였던 서울 종로구 화동 138번지. 언론인 설의식(1900∼1954)은 “창문은 깨지고 벽은 허물어져 바람과 눈을 막지 못했고, 기와가 떨어져나가 더위를 피할 수 없던 집”이라고 회고했다. 동아일보 설립 신청 서류를 작성했고, 나중에 사장을 지낸 국어학자 이희승(1896∼1989)은 “동아일보 창간호를 받아 쥔 서울시민 가운데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동아일보 만세’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아일보 창간사#동아일보#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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