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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스포츠

이춘광 “내 뜻 어겼지만… 승엽이가 다 옳았죠”

입력 2017-09-30 03:00업데이트 2017-09-3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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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앞둔 ‘국민타자’ 부친 이춘광씨
아버지 이춘광 씨의 대구 자택 방 벽에는 아들인 ‘국민타자’ 이승엽의 사진 액자가 빼곡히 진열돼 있다. 이 씨는 “액자가 더 많이 있는데 올해 초 작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정말 중요한 사진들만 벽에 걸어뒀다”고 했다. 대구=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동물원 우리 속에 갇혀 있던 사자가 자유를 되찾은 것처럼 기뻐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춘광 씨(74)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막내아들 이승엽(41·삼성)에게 야구를 허락했을 때를 회상하면서다. ‘국민타자’ 이승엽은 내달 3일 정들었던 유니폼을 벗는다. 최근 대구 자택에서 만난 이 씨는 “이렇게 많은 팬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줄 알았다면 진작 야구를 허락할 걸 그랬다”며 웃었다. 그는 “막상 은퇴한다 하니 나도 많이 아쉽다. 그래도 한 번 뱉은 말엔 책임을 지는 게 맞다. 많은 사람의 축복과 아쉬움 속에 퇴장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승엽은 일곱 살 생일에 야구용품을 사 달라고 졸랐다. 이승엽은 왼손잡이라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사야 했다. 이 씨가 대구시내 운동용품점을 다 뒤져 구해온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이승엽은 그날부터 끼고 살았다. 이 씨는 “승엽이가 또래 친구들과는 안 놀고 세 살 위인 형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야구를 했다”고 했다.

이승엽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 씨는 반대했다. 이승엽은 며칠간 밥을 안 먹었다. 시간이 흐른 뒤 이 씨가 물었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으냐.” 이승엽은 “야구만 시켜주면 앞으로 절대 엄마 아빠 속 썩이는 일 없을 거예요”라고 약속했다. 이 씨는 “승엽이가 그렇게 말한 지 30년이 흘렀다. 은퇴하는 이날까지 약속을 잘 지켜준 아들이 너무 고맙다”고 했다.

이승엽은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를 합쳐 624개의 홈런(한국 465개, 일본 159개)을 쳤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 일본전 결승홈런 등 국제대회에서 친 홈런도 꽤 된다. 그렇지만 이 씨 기억 속 최고의 홈런은 이승엽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친 첫 홈런이다.

그는 “동대문야구장 어린이구장에서 홈런을 쳤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들의 소질을 처음 확인할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이 씨는 또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때가 제일 좋았다. 초등학생은 미완성 아닌가. 그래서 더 큰 희망을 볼 수 있었다”라고도 했다.

아들이 가장 멋져 보였을 때는 봉사활동을 할 때였다고 했다. 이 씨는 “야구를 잘할 때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하지만 제일 멋있었을 때는 삼성서울병원 소아암 병동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아들을 볼 때였다. ‘진정으로 스타가 됐구나’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효자 아들이지만 이승엽은 결정적인 순간 몇 차례 아버지의 뜻을 거슬렀다. 대학 진학을 원했던 아버지의 뜻과 달리 삼성행을 택했고 한국 잔류를 원했던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씨는 “결국 승엽이의 판단이 다 맞았다. 은퇴 후 제2의 인생도 잘 살아갈 것이라 믿는다. 30년간 유니폼을 입고 멋진 선수 생활을 했다. 오늘의 이승엽을 만들어 준 유니폼에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예전에 이 씨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승엽이는 꿈을 먹고사는 아이예요. 산 너머 무지개가 있잖아요. 그걸 잡으러 산을 넘어 그 자리에 가 보면 무지개는 또 저쪽에 가 있죠. 승엽이는 그렇게 살아 왔어요. 끊임없이 도전하고 힘든 길을 택해서 가죠.”

은퇴 후 이승엽이 찾아 나설 무지개가 궁금하다.

대구=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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