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됨’의 단가표[2030세상/김지영]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26일 23시 09분


어느덧 임신 8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단언컨대 살면서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몇 달이었다. 임신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몰랐다. 생전 처음 겪는 종류의 불편과 통증에 ‘이게 맞아?’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가 하면 한 생명이 생겨나고 자라나는 것을 보고 느끼는 일은 경이롭다. 콩알만 한 것에서 심장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사람의 형체를 갖추더니 이제는 숨쉬듯 느껴지는 발길질을 당해내고 있노라면 그 밖에 달리 형언할 길이 없다. 세상에는 간접 체험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배워 나가는 중이다.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그 과정에서 가장 낯설고 어려운 것은 이른바 ‘출산 준비’라 일컬어지는 것들이다. 이제 막 안정기에 들어섰던 무렵 친구가 말했다. “산후조리원은 예약했어?” 부랴부랴 전화를 돌렸더니 좋다는 곳들은 이미 만실이었다. 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가격대였다. 단순히 비싼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선택 범위가 너무 넓다는 것이 당혹스러운 지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당장 출퇴근에 바쁜 맞벌이 부부는 산달을 목전에 두고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져 ‘베이비 페어’에 다녀왔다. 유모차며 이유식 의자까지 브랜드는 왜 이리 많고 가격대는 또 왜 이리 천차만별인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용품은 그나마 낫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터’를 구해야 하는데, 아이의 안녕과 직결된 단가표에 정신이 다 아찔하다.

기시감이 들었다. 결혼을 준비하던 시절, 예식장이며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며 ‘선택 지옥’에 빠졌다. 다만 그때라면 명확한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 적당히 경건하되 합리적인 선에서 빠른 의사결정을 추구했고, 예식 자체보다는 다시는 없을지 모르는 남미 신혼여행에 보다 많은 공을 들였다. 내가, 우리가 당사자이니 가능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출산은 달랐다. 아이가 대상이고 그마저도 처음이니 주변의 조언과 무한 검색에 기댈 뿐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아이와 관련된 선택이라면 다를 수 있겠다고. 아이가 자라면서 누구는 얼마짜리 외투를 입고 얼마짜리 교육을 받고 얼마짜리 휴가를 가는지 마음이 쓰일 수 있겠다고. 이전에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진정한 계급 사회로 진입하게 된 느낌이라 불현듯 아득해졌다.

인구 소멸 시대의 주된 이유로 꼽히는 ‘경제적 부담’의 이면은 결국 좋은 부모가 되어주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아닐까. 결혼을 준비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결혼식’이 아닌 ‘부부 됨’을 준비하고 싶다고. 마찬가지로 ‘출산’이 아닌 ‘부모 됨’을 준비하고 싶다. 세상 좋은 것은 다 주고 싶겠지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사랑만큼은 아낌없이 주자 다짐한다. ‘금수저’는 아니더라도 ‘사랑수저’만큼은 확실하게 물려주자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한다.

돌이켜 보면 나를 지킨 것은 값비싼 외투가 아닌 ‘우리 공주님’ 하고 안아주는 아빠의 품이었고, 나를 꿈꾸게 한 것은 이름난 학원이 아닌 ‘엄마는 우리 딸 믿어’ 입버릇처럼 말하던 엄마의 지지였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재산 아닐까.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부모#단가표#2030세상#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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