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성과 지지… 연날리기와 같은 가족관계[기고/이레지나]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26일 23시 09분


이레지나 서울부부가족치료연구소장·한국상담대학원대 교수
이레지나 서울부부가족치료연구소장·한국상담대학원대 교수
설이 다가오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떠오른다. 조부모와 함께 살았던 우리 집에서 설날은 축제와 같았다. 집 안 곳곳에 음식 냄새가 가득하고 새배를 드리러 온 친척들과 끊임없이 들락날락하던 손님들로 북적이던 풍경이 생생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할아버지의 넉넉한 인심이었다. 할아버지는 새배하러 온 아이들에게 주머니에 가득 넣어둔 세뱃돈을 세지도 않고 한 줌씩 나눠 주셨다.

나 역시 할아버지에게 특별한 선물을 받곤 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대나무와 한지로 만든 연이었다. 겨울이면 얼어붙은 논밭은 우리들의 광장이자 놀이터였다. 할아버지와 함께 논으로 나가 연을 날리던 추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연이 높이 날아오르면 연줄의 팽팽한 느낌을 조율하며 바람과 교감하듯 움직였다.

이런 연날리기는 가족 관계와도 닮아 있다. 특히 ‘분화’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가족치료학자 머리 보언이 제안한 분화란, 개인이 가족 체계 안에서 정서적으로 독립을 이루는 과정을 말한다. 이는 가족의 기대와 규칙 속에서 움직이되, 자신의 고유한 신념과 자율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가족마다 분화의 정도는 상이하다. 분화가 덜 돼 있을수록 가족 내 갈등이 빈번하고, 개인의 성장에도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다. 반면 분화 수준이 높은 가족은 갈등이 적고, 건강한 가족 체계를 유지한다. 이런 가족은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개인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그 결과 각자가 더 성숙하고 자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를 연날리기에 비유해 연이 자녀라면 연을 잡고 있는 사람은 부모, 그리고 연줄은 이들 간 정서적 연결이다. 연줄을 적당히 풀어주면 연은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간다. 자녀가 자신의 삶을 향해 날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연줄을 너무 꽉 쥐고 있다면 연은 하늘로 오를 수 없다. 반대로 줄을 완전히 놓아버린다면 연은 곧바로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부모가 연줄을 잡고 있어야 연은 안정적으로 날 수 있고, 자녀 역시 정서적으로 부모와 연결돼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온전히 펼칠 수 있다.

설은 가족이 모이는 시간이다. 그러나 가족 간에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동시에 때로는 서로의 의견 차이로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도 생긴다. 이번 설에는 연날리기처럼 잘 분화된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면 어떨까. 자녀들의 정치적 견해, 경제관, 취미, 삶의 방식 등이 무엇이든 그들의 날갯짓을 존중하고 지켜봐주자.

동시에 부모로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지지하는지 표현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랑과 지지는 단지 마음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을 통해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일례로 진심으로 근황을 묻고,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며 그동안의 노력과 성과에 대해 진심 어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자. 앞으로의 행복을 기원하는 덕담과 함께 그들이 계속해서 잘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약속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따뜻한 말과 행동들은 가족들에게 마음의 힘을 불어넣어주며, 그들이 더 큰 도전과 성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심어줄 것이다. 설날, 가족이라는 연줄을 통해 서로 연결돼 있으면서도 각자의 하늘로 날아오르는 따뜻한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설날#자율성#가족관계#연날리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