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5월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윤 대통령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돼야 한다”고 했다. 19일 새벽 쇠파이프 등을 든 윤 대통령 지지 시위대가 대통령 구속영장을 발부한 서울서부지법에 테러를 가한 사건이야말로 반지성주의를 상징한다. 그날 시위대는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뿌리째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자신이 비판했던 반지성주의를 무기로 활용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21일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대한민국에서 국회와 언론은 대통령보다 훨씬 강한 ‘초갑(甲)’”이라고 주장했다.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거야(巨野) 더불어민주당보다 ‘을’인 대통령을 지켜달라는 요청과 함께 부정선거 음모론을 퍼뜨리는 극우 유튜버를 믿으라는 선동적 메시지다. 보란 듯 계엄 선포 때처럼 2 대 8 가르마 머리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나온 것부터 상징적이다.
부정선거 음모론도 이어갔다.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 전에 선거 공정성에 대한 신뢰에 의문이 드는 것이 많이 있었다. 선거를 부정하며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팩트 확인 차원”이라고 했다. 부정선거 팩트를 찾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주장이다.
윤 대통령 발언은 앞뒤도 맞지 않는다. 계엄군이 준비했던 알루미늄 야구 방망이와 케이블타이, 안대, 복면, 밧줄이 팩트 체크용이란 말인가. 더욱이 윤 대통령은 15일 체포 직후엔 “우리나라 선거에서 부정선거의 증거는 너무나 많다”고 했다. 하지만 헌재 변론에선 슬그머니 팩트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을 바꿨다. ‘너무나 많은 증거’가 6일 만에 확인이 필요한 의혹으로 바뀐 셈이다. 국민의힘이 지난해 4·10총선에서 108석을 얻어 개헌 저지선(100석)을 간신히 넘기는 참패를 당한 것이 부정선거의 결과라는 윤 대통령의 믿음에 별 증거가 없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발언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의 “부정선거와 관련한 놈들을 다 잡아서 족치면 부정선거가 사실로 확인될 것”이란 발언이 더 진실에 가깝게 들린다.
윤 대통령의 취임사를 다시 꺼내 읽게 한 것은 윤 대통령 자신이었다. 윤 대통령은 17일 서울구치소에서 “대통령 취임사부터 그동안 국민께 드렸던 말씀을 다시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지나온 국정을 되돌아보고 있다”고 메시지를 냈다. 자신이 강하게 비판했던 반지성주의의 화신, 우두머리가 된 모습이 윤 대통령 눈에는 보이지 않나 보다. 윤 대통령은 지금도 자신을 지지하면 ‘애국 시민’, 반대하면 ‘반국가 세력’으로 분열시키고 있다. 애국 아닌 ‘슈퍼챗’ 돈벌이가 목적인 극우 유튜버들이 윤 대통령 등에 올라탔다.
고 황현산 문학평론가는 2015년 11월 “반지성주의가 지배하는 독재국가에서 가장 일상적인 고통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지당한 소리처럼 날마다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고통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궤변과 거짓말, 모르쇠를 끊어야 국민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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