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정은]‘애국시민’ 여러분, 애국하고 계십니까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20일 23시 21분


이정은 부국장
이정은 부국장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영장 발부에 반발한 시위대가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난입한 폭력 사태는 4년 전 미국에서 벌어진 1·6 의회 난입 사태와 닮았다. 보수 대통령이 주장하는 부정선거 의혹 속에 성난 지지자들이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기관으로 몰려가 창문을 깨고 문짝을 부수며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음모론을 주장하는 ‘프라우드 보이스’ 같은 단체가 앞장서며 경찰과 거칠게 충돌했다.

법치와 국격 훼손한 폭력난입 사태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에게 잊혀지지 않는 또 하나의 장면은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상황이 종료됐다고 생각하던 시점에 나왔다. 군복 차림의 병사 수백 명이 의회 내 곳곳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총을 들고 완전군장을 한 채 로툰다홀을 일렬로 가로지르는 군인들도 있었다. 사태 발생 며칠 뒤 조용해진 의회 안으로 발을 디딜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의회와 군대의 무시무시한 부조화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들은 준(準)전시 상황이 되어버린 워싱턴에 투입된 주방위군이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에 또다시 벌어질지도 모르는 폭력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당시 2만 명이 넘는 주방위군이 투입됐는데, 이들 일부가 숙박시설이 아닌 의회 안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의 추가 폭력에 대비하려고 이렇게까지 많은 병력을 투입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지만 당시 분위기는 그만큼 삼엄했다. 이들의 철수가 완료되기까지는 이후 두 달이 걸렸다.

의회 혹은 사법기관을 겨냥하는 정치적 폭력 사태는 그 자체로도 심각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이 반복되고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틀 속에서 서로가 지켜왔던 법치의 선을 넘어버림으로써 내부 혹은 반대쪽 진영을 자극하게 된다. 가뜩이나 악화하는 정치 양극화를 극단으로 치닫게 만든다. 한번 경험한 폭동은 불안을 키우고, 그렇게 불어난 불신은 점점 더 많은 공권력 투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국가적 낭비다.

윤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하며 서부지법 앞에 모여있던 이들은 윤 대통령이 ‘애국시민’이라고 부르는 지지자들이다. “나라 안팎의 주권침탈세력과 반국가세력의 준동으로 위험해진 대한민국”을 지켜달라는 윤 대통령의 편지 속 당부 메시지가 향했던 사람들이다. 방식과 방향은 다르지만, 국가의 부를 쌓고 안보를 지키는 일에 진심인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20대 학생부터 80대 기업인까지, 보수의 가치에 공감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나온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폭력 사태로 애국시민은 어느새 극우 유튜브의 음모론에 휘둘리는 막무가내 세력으로 치부될 처지에 놓였다.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를 갉아먹고 국격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계엄만도 벅찬데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최했던 국가로 국제사회에 명함을 내밀기도 민망하다. 주요 8개국(G8)이니 G10 같은, 선진국 그룹으로의 편입 기대도 당분간은 접을 수밖에. “안정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는 국가적 신뢰가 기본 조건인데, 그 전제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다”는 탄식이 나온다.

반복, 확산하며 피해 키울 가능성 우려


둑이 터져버린 폭력적 선동은 또 언제, 어떻게 되풀이될지 모른다. 헌법재판소 앞에서는 벌써 3명이 월담을 시도하거나 경찰과 충돌했다가 체포됐다. 윤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는 신변 보호를 요청해야 했다. 긴장감이 팽팽해진 현장에서 또 무슨 우발적 상황이 벌어질지 조마조마하다. 흔들리는 법치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소모되는 국가적 에너지도 상당할 것이다. 이런 일을 벌이고 또 동조하는 것이 진짜 애국시민들이 하겠다는 애국이냐고 묻고 싶다.

#폭력 사태#정치적 폭력#윤석열#시위대#민주주의#법치#정치 양극화#애국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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