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서배스천 스탠(오른쪽)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영화 ‘어프렌티스’. 트럼프의 목표는 ‘위너’가 아닌 ‘킬러’다. ㈜누리픽쳐스 제공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1]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비판적으로 다룬 영화 ‘어프렌티스’(2024년)에는 뉴욕 부동산 업자의 아들로 세입자들에게 밀린 집세를 받으러 다니던 트럼프가 일약 미국 최고 부동산 부자로 성장하는 과정이 담겼어요. 여기서 트럼프는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3가지 법칙을 밝히는데, ①세상은 원래 엉망이다. 그러니 상대를 무조건 공격하라 ②진실이란 없다. 내가 말하는 게 진실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말고 부인하라 ③아무리 불리해도 패배를 인정하지 말고 오직 승리만 생각하라가 그것이죠. 놀랍죠? 요즘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금과옥조와 판박이이니 말이에요. 경영이든 정치든 양심과 도덕은 똥개에게나 줘버리는 게 정상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탁월한 통찰을 선물해주죠.
영화를 보면 트럼프가 미국 주류 언론의 융단 폭격에도 대통령에 재선된 이유를 짐작할 만한 키워드가 등장해요. 트럼프는 강조하죠. 자신의 목표는 ‘위너(winner·승자)’가 아니고 ‘킬러(killer·포식자)’라고요. 승자는 단지 패자의 반대 개념일 뿐이지만, 포식자야말로 매순간 더 크고 강렬한 목표를 무자비할 만큼 욕망하게 만드는 최강의 비전이니까요. 트럼프는 적어도 위선적이진 않아요. 그는 “우린 동물이야. 모두 부자가 되고 싶고, 사람들이 나에게 굽신거리길 바라지”라고 불편할 만큼 직설적으로 내뱉죠. 남을 굴복시키는 데서 오는 본능과 지배의 쾌감, 이것이 부자나 권력자가 되려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말이에요.
[2] 인간의 악마 같은 지배 욕망. 이것을 ‘송곳니’(2009년)처럼 출중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달리 없어요. 그리스 출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출세작인 이 작품에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진 집을 지은 채 자녀 셋을 태생부터 세상과 격리해 키우는 부모가 등장해요. TV도 라디오도 인터넷도 없이 평생을 부모의 가스라이팅을 통해 가축처럼 사육되어 온 자녀들은 어느덧 청년이 다 되었지만 자기 처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행복한 돼지처럼 살죠. 특히 새로운 단어의 뜻을 부모가 자녀에게 학습시키는 장면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에요. ‘바다’란 단어는? ‘나무 팔걸이가 있는 가죽의자’란 뜻이다. “서 있지 말고 바다에 앉아서 나와 조용히 이야기하자”와 같이 사용한다. ‘여행’이란 단어는? ‘바닥을 만들 때 쓰는 매우 단단한 재료’란 뜻이다. “샹들리에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바닥이 여행으로 만들어져 있어 멀쩡했다”와 같이 사용한다. 그럼 ‘음부’란 단어는? ‘큰 전구’란 뜻이다. “음부가 나가면 방이 캄캄해진다”와 같이 사용한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세뇌를 통해 부모는 아이들이 ‘바다’와 ‘여행’을 떠올리며 자유를 꿈꾸거나 ‘음부’란 단어를 떠올리며 성욕에 몸부림치는 일이 없도록 발본색원하죠.
[3] 감독이 혹시 미친놈은 아니냐고요? 아직 비난은 일러요. 란티모스 감독의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2024년)라는, 제목부터 현기증 나는 최신작엔 로버트(제시 플레먼스)란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해요. 그는 수요일 오전 7시에 ‘반드시’ 일어나요. 파란색 정장과 흰색 셔츠를 ‘반드시’ 입고, 검은색 몽크 스트랩 슈즈를 ‘반드시’ 신은 채 출근해요. 점심으론 ‘반드시’ 소고기 버거에 밀크셰이크를 먹고, 저녁으론 링귀니 볼로네제와 감자 그라탕, 아몬드와 베리가 들어간 초콜릿 무스를 ‘반드시’ 먹어요. 오후 11시에는 조니워커 레드라벨 위스키를 온더록스로 ‘반드시’ 마시고, 오후 11시 반에는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리나’를 읽고, ‘반드시’ 아내와의 성관계 없이 잠에 들죠. 왜 ‘반드시’냐고요? 그의 상관인 레이먼드(윌럼 더포)의 지시 사항이거든요. 심지어 레이먼드는 이튿날 밤 병원 앞에서 SUV를 타고 대기하다가 때마침 병원에서 나오는 스카이블루색 BMW의 측면을 강하게 들이받아 운전자를 죽여야 하는 미션을 로버트가 수행하도록 명령해요.
어때요? 구토가 절로 쏠리죠? 란티모스 감독은 상대를 통제하고 억압하고, 마치 조물주라도 된 양 내 맘대로 움직이도록 설계하고 조종하고 지배하는 데서 오는 자기효능감과 도취감이 권력의 본질임을 일깨워줘요. 아마도 적잖은 직장인이 공감할걸요? 상사가 진짜로 원하는 건 더 나은 성과를 내는 내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나의 굴욕적인 모습이다! 일본 성애영화에 직장 상사가 무능하고 소심한 부하 직원의 아내를 범하는 정신 나간 설정이 많은 것도,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로 세상을 바라보는 동물성이 깔렸다고 봐야겠죠.
그래서 웬만한 판타지-액션-스릴러 영화 뺨치는 요즘 국내 TV 뉴스를 보면서, 양극이 벌이는 외나무다리 결투의 본질을 새삼 생각합니다. 분명 그건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경쟁은 아닐 거예요. 오직 ‘지배할 것이냐, 지배당할 것이냐’일 뿐인 그들의 목표는, 위너가 아닌 킬러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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