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에게 ‘좋은 사회’란?… 시민들의 자존감 보장하는 사회[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20일 23시 03분


자존감은 모두 가져야 할 ‘기본선’
삶의 목적-달성 능력 있을 때 생겨
자연-사회적 우연에 달려선 안 돼
제도로 불운한 자 최우선 배려해야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삶의 목적을 추구할 때 갖게 되는 ‘가치 있다’는 느낌과 이러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자존감의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타고난 장애, 부모의 부와 배경 등 삶의 출발선에서 얻은 불운으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할 수 없다면 좋은 사회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위쪽 사진은 휠체어육상 선수가 경기하는 모습, 아래쪽 사진은 토머스 케닝턴의 1885년 작품 ‘고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삶의 목적을 추구할 때 갖게 되는 ‘가치 있다’는 느낌과 이러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자존감의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타고난 장애, 부모의 부와 배경 등 삶의 출발선에서 얻은 불운으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할 수 없다면 좋은 사회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위쪽 사진은 휠체어육상 선수가 경기하는 모습, 아래쪽 사진은 토머스 케닝턴의 1885년 작품 ‘고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운(運)의 중립화가 곧 ‘정의’

누구나 살기 좋은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은 어떨까?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는 함께 살기 위해 모든 사람이 합리적으로 획득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선(a primary good)으로 자존감을 꼽는다. 롤스는 “자존감이 없다면 어떤 것도 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이며, 또한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가치가 있더라도 그것들을 추구할 의지를 상실하게 된다. 모든 욕망과 활동은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될 것이며, 우리는 무감각하고 냉소적인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존감을 침해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을 피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롤스는 두 가지 차원에서 자존감을 구분한다. 첫째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추구할 때 갖게 되는 ‘가치 있다’는 느낌이고, 둘째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탁월함’을 만족시키고자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고 노력할 때, 우리의 인격이 존경받고 행위가 인정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탁월함이란 인간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좋음(선·善)’이다.

이러한 탁월함을 갖지 못한 사람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남들보다 신체적·경제적으로 열등한 조건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세우고 살아갈 때, 능력이 부족하거나 조건이 맞지 않는다고 느껴 쉽게 좌절하거나 실패하는 일이 많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자포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신조어까지 있다.

자존감과 반대되는 수치심은 인생의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이 결핍되면서 생겨나는 ‘좌절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롤스는 수치심을 ‘능력의 탁월성’의 부재 및 상실에 따른 자연적 수치심과 ‘인격의 탁월성’의 부재 및 상실에서 기인하는 도덕적 수치심으로 구분한다. 자연적 수치심을 살펴보면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탁월성을 갖지 못할 경우 자부심이 손상돼 생기는 감정이다. 지능, 재능, 외모 등 타고난 능력에 따라 인생의 출발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연적 수치심과 구별되는 도덕적 수치심은 도덕적인 덕, 특히 정의감을 갖고 행위하지 못하는 경우 생겨나게 된다. 도덕적 수치심은 자신의 인생 계획이 도덕 규범과 일치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인간은 존엄감과 도덕감에 기초해 자존감을 느끼는 인격적 주체다. 그러나 예를 들어 군인이 전쟁에서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경우 생명을 보존하는 기쁨(행복)을 누릴 수 있지만, 제대로 싸우지 않아 용기(탁월성)를 발휘하지 못한 것에 수치심을 갖게 된다. 군인의 본분인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도망간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롤스는 이 같은 자존감의 사회적 토대가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재화이며, 정치적 평등의 원칙에 따라 이 같은 재화가 분배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절차적 정의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능력이나 소질, 사회적 우연성에 의해 가장 불리한 사람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최소극대화(Minimax)’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는 ‘자존감이 차등 원칙에 의해 더 확고하게 강화되고 지지된다’고 강조한다. 극빈자의 기대치를 증진시키는 ‘차등의 원칙’, 공정한 기회를 허용하는 ‘기회균등의 원칙’, 그리고 ‘평등한 자유의 원칙’을 지킴으로써 정치적 평등을 실현하고, 사회적 약자의 자존감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롤스는 무엇보다도 일할 기회가 없는 시민(실업자)의 자존감이 손상되기 쉽기 때문에, 유사한 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 유사한 인생의 기회를 갖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공정한 기회 균등을 통해 자아 실현을 최대한 보장하려면, 자존감이 낮은 최소 수혜자가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불평등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어 롤스는 자존감을 ‘개인적 자존감’과 ‘시민적 자존감’으로 다시 한 번 구분한다. 그리고 ‘개인적 자존감’에 우선하는 ‘시민적 자존감’을 보장하기 위해선 평등한 시민권을 보장하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확립할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차등의 원칙과 정치적 결사체를 통해 ‘시민적 자존감’의 사회적 기초를 만들어 정치적 평등을 제도적으로 확립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개인의 자존감은 타인의 존중에 의존하기 때문에 ‘상호존중의 의무’가 필요하다. 이것은 타인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대우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 목적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인정받을 때 자부심을 갖는다. 정의의 원칙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자존감을 위해 서로 존중하는 의무를 지킬 때 최우선 고려해야 할 사람은 불운한 사람들이다. 개인이 외모와 재능과 같은 ‘자연적 우연’이나, 타고난 부와 배경 같은 ‘사회적 우연’에 좌우되지 않도록 배려해야 된다.

인생의 전체가 태어날 때 갖는 운으로 정해지는 사회는 옳지 못하다. 정의로운 사회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운빨’에 의해 인생 전체가 결정되지 않게 하는 ‘운의 중립화(Neutralizing Luck)’ 원칙을 갖춘다. 태생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태어나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들이 기죽거나 주눅 들지 않도록 배려하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롤스의 좋은 사회는 약자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사회다. 개인의 자존감은 사회적 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 스스로 자신에 대한 신뢰를 갖기 위해 사회적 제도를 통해 시민들의 자존감을 보호하는 일이 필요하다.

#정의론#존 롤스#자존감#기본선#수치심#탁월함#시민적 자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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