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왼쪽)이 소련 KGB와 영국 MI6의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다가 소련을 탈출한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를 백악관에 초청해 격려하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정일천 가톨릭관동대 초빙교수·전 국정원 국장지난해 정보사 군무원이 내부 기밀을 중국인에게 유출한 사실이 드러나 정보기관 내부 스파이가 이슈화된 바 있다. 스파이 세계에서 핵폭탄만큼 위력적인 정보 자산은 정보기관 요원 신분의 ‘이중 스파이’다. 과거 냉전 시기 동서 양 진영은 상대 정보기관 요원을 포섭해 정보를 수집하고 간첩을 색출하는 데 활용했다. 그중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으로 영국 비밀정보국(MI6) 스파이로 활동한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는 영화 같은 이야기로 스파이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1966년 외교관 신분으로 덴마크에 파견된 정보요원이었다. 하지만 파견 이후 서방의 자유를 경험하고 소련에서 금서였던 책들을 탐독하면서 사상적 동요를 겪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체코 민중봉기 시기 소련의 잔혹한 진압 과정을 목격하고는 조국에 대한 신념을 접고 말았다. 대사관 전화가 주재국에 도청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인과 통화하며 소련을 비판했을 정도다. 결국 1974년 덴마크의 요청을 받은 MI6는 포섭에 성공했는데, 그의 협조 동기 역시 소련 체제에 대한 반감이었다.
그는 이중 스파이로 활동을 시작한 후 대사관 비밀문서와 서방에서 암약 중인 소련 스파이 명단을 제공하는 등 최고의 정보 출처가 되었다. 특히 그가 제보한 스파이 리스트에는 영국 등 서방의 유력 정치인과 노조 간부도 포함돼 있었다.
1978년 덴마크 파견을 마치고 소련에 복귀한 그는 잠복기를 거친 후 1982년 운 좋게 영국으로 파견되면서 스파이 활동을 재개했다. 그런데 그가 재파견된 1980년대 초부터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대소련 강경책으로 양국 간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미국이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판단 아래 수백 기의 미사일과 장거리 핵 폭격기 등을 배치하고 매일 펜타곤(미 국방부 청사)의 야근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고르디옙스키는 이런 소련 지도부 동향을 MI6에 보고했고, 이를 심각하게 여긴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레이건 대통령에게 관련 정보를 전달했다. 결국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에 대한 압박 수위를 낮추고 외교 루트로 전쟁 우려를 불식시키는 일련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쿠바 미사일 사태 같은 일촉즉발의 핵전쟁 위기는 해소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방국 간 정보 공유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영국이 정보 출처를 미국에 숨겼음에도 소련 스파이였던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 올드리치 에임스가 고르디옙스키를 의심하는 내용을 KGB에 보고한 것이다. 당시 에임스는 소련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MI6로부터 공유되는 소련 관련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고르디옙스키에게 긴급 귀환 명령이 내려졌고, 그는 복귀해 조사를 받았지만 자백하지 않았다. 결국 위기에 처한 그가 MI6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1985년 6월 ‘핌리코 작전’으로 명명된 구출 공작이 개시됐다. 그는 감시를 피해 국경 근처로 이동한 후 가족 진료차 핀란드를 방문하는 것으로 위장한 소련 주재 MI6 요원의 차 드렁크에 숨어 소련을 탈출했다.
근대 이후 스파이 역사는 이중 스파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중 스파이는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냉전 시기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낀 소련 정보요원들의 전향은 스파이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외교관들의 망명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북한 엘리트들의 체제에 대한 회의와 불만은 북한판 고르디옙스키의 출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동기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다는 점에서, 우리 정보기관에는 기회로 볼 수 있다. 지금 해외 어디에선가 드러나지 않은 잠재적 고르디옙스키들이 대한민국이 내미는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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