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20년된 ‘고래’ 부커상 후보로 펄떡… K문학 세계로 이끈 번역의 힘[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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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으로 날개 단 한국문학

이호재 문화부 기자
이호재 문화부 기자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편 중 장편소설 ‘고래’(2004년)가 유력한 수상 후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고래’가 가장 큰 라이벌이었다.”

영국 런던 스카이가든에서 23일(현지 시간) 열린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시상식. 불가리아 작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55)는 장편소설 ‘타임 셸터(Time Shelter)’로 상을 받은 뒤 천명관 작가(59)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천 작가는 29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영국 현지에서 ‘고래’가 신선하다는 평가가 많아 고스포디노프가 긴장한 것 같았다”며 “수상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최종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했다.

‘고래’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부커상의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한국 문학의 세계화 가능성이 확인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정보라 작가의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에 이어 한국 작가의 작품이 2년 연속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엔 한국 문학이 더 다양해진 데다 수준이 높아진 번역의 날개를 달고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번역된 언어 수, 10년 전의 2배

최근 한국 문학에서 번역의 힘을 보여주는 건 다양해진 언어다.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 문학 작품은 27개 언어로 번역됐다. 2012년 14개 언어로 번역된 데 비하면 10년 만에 2배 가까이로 늘어났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주요 국가의 언어뿐만이 아니다. 그리스어 루마니아어 보스니아어 우크라이나어 크로아티아어 같은 상대적으로 생소한 언어로도 번역 출간되고 있다.

출간 종수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해외에 출간된 한국 문학 작품은 157건으로, 2012년 57건에 비해 3배 가까이로 늘었다. ‘고래’는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 독일어 튀르키예어로 번역 출간됐고, 이탈리아어 번역이 진행 중이다. 천 작가의 다른 작품인 장편소설 ‘고령화 가족’(2010년·문학동네)은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국어 루마니아어 몽골어로 출간됐다. 천 작가는 “‘고래’를 폴란드어와 아랍어로 번역 출간하는 것을 논의 중이다”라고 했다.

국제 문학상에서 한국 문학의 위상도 높아졌다. 올해 유력 국제상 후보에 오른 한국 작품은 8편이다. 지난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오른 박상영의 연작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2019년·창비)은 올 1월 아일랜드 국제 더블린 문학상 1차 후보에 올랐다. 손원평의 장편소설 ‘프리즘’(2020년·은행나무)은 올 4월 일본 서점대상 번역소설 부문 2위를 수상했다. 영미권과 아시아권 외에서도 인정받는 추세다. 김애란의 단편소설집 ‘바깥은 여름’(2017년·문학동네)과 정이현의 단편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2016년·문학과지성사)는 올해 러시아 야스나야폴랴나 문학상 해외문학 부문 후보에 올랐다.

●번역가, 작품 발굴에서 마케팅까지

한국 문학의 위상이 높아진 데에는 번역가의 공로가 컸다. 번역가의 인지도가 국제상 입후보에 효과를 내기도 한다. 영국에서 ‘천명관’이라는 이름이 비교적 생소했던 상황에서 ‘고래’가 부커상 후보에 오른 데에는 김지영 번역가의 인지도가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다. ‘고래’의 김지영 번역가는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2008년·창비)로 2012년 맨 아시아 문학상을 받았을 정도로 영미권에서 인정받는 번역가다. 김 번역가는 2007년부터 활동하며 정유정의 장편소설 ‘7년의 밤’(2011년·은행나무), ‘종의 기원’(2016년·은행나무), 김영하의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년·복복서가), ‘빛의 제국’(2006년·복복서가) 등 한국 작품을 다수 번역했다. 김 번역가가 영어로 옮겨 2022년 미국에서 출간된 구병모의 ‘파과’(2013년·위즈덤하우스)는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주목할 만한 책 100선’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번역가가 한국 문학 작품을 발굴하고 해외 출판사를 연결하는 한편 마케팅까지 하기도 한다. 지난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저주토끼’를 발굴한 건 번역가 허정범(안톤 허)이다. ‘저주토끼’는 한국에선 비주류에 속하는 공포, 공상과학(SF) 장르다. 허 번역가는 2018년 서울와우북페스티벌에서 정보라 작가를 만난 뒤 번역 출간을 제안했다. 정 작가는 그때까지 국내에서 알 만한 문학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 허 번역가는 해외 출판사를 연결해 이 책이 출간되는 것까지 도왔다. ‘대도시의 사랑법’을 발굴해 해외 출판사를 연결한 이도 허 번역가다. 허 번역가는 최근 전화 통화에서 “한국 문학 번역가가 작품을 해외 에이전트에 소개하는 건 기본이다”며 “번역가가 직접 해외 언론을 만나고 서점 행사에 참여하는 등 마케팅까지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부커상은 이 같은 번역가의 기여를 인정해 작가와 번역가에게 상금을 절반씩 나눠 지급한다.

●판타지 SF 등 장르문학 번역도 활발

최근엔 번역 출간되는 장르가 판타지, SF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2020년 출간 후 한국 베스트셀러에 오른 판타지 장편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미예 지음·팩토리나인)은 2021년 러시아어, 2022년 독일어 튀르키예어 베트남어로 발 빠르게 번역 출간됐다.

김초엽의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2021년·자이언트북스), 단편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019년·허블)은 일본어로 번역됐다. 두 책을 번역한 강방화 번역가는 “일본 독자들이 한국 장르문학을 일본 작품보다 신선하고 재밌다고 생각한다”며 “기본적인 과학 지식만 있으면 읽기에 어렵지 않은 ‘소프트 SF’나 여성주의 시각이 묻어나는 작품을 특히 많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스페인어로 우리 작품을 번역하는 윤선미 씨는 “해외 출판사에서 먼저 연락이 와 독특한 작품이 없냐고 문의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독창적이고 기괴한 작품을 한국이 만든다는 시각이 넓게 퍼져 있는 게 장르문학 인기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책의 ‘몸값’도 올라가고 있다. 이영도 작가가 2003년 출간한 판타지 장편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전 4권·황금가지)는 올 1월 선인세 약 3억 원을 받고 유럽의 한 출판사에 판매됐다. 이는 단일 국가에서 받은 한국 출판물 선인세 중 최고액이다. 앞서 김수현의 에세이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2020년·놀)가 일본 출판사로부터 받은 선인세 2억 원, 김언수의 장편소설 ‘설계자들’(2010년·문학동네)이 미국 출판사로부터 받은 1억 원을 넘어선 것이다. 지난해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책의 영문 번역본이 소개된 것을 계기로 해외에서 러브콜이 쏟아진 것이 선인세 상승으로 이어졌다.

●“번역에 적극 투자 필요”

하지만 번역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 문학이 가요나 드라마, 영화 등 다른 장르만큼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번역의 다양성을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번역가는 “일부 나아지긴 했지만 부커상 외에 다른 국제상에서 한국 문학이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한국 문학이 번역 출간되는 나라가 여전히 영미권이나 아시아권에 편중된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면 곧 한계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정부 차원의 지원이 확대되지 않는다면 번역의 품질이 유지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허정범 번역가는 “번역에 대한 관심은 많아졌지만 여전히 노력한 만큼 대우를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수입이 10년 전에 비해 절반 수준이라 다른 일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은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넘어 ‘세계 문학으로서의 한국 문학’이 되려면 번역에 대한 적극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호재 문화부 기자 hoho@donga.com


#k문학#번역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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