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10분 내외의 짧은 여섯 편 단편으로 짜인 옴니버스 구성이다. 각각 다른 감독들이 연출을 맡았는데 각 작품마다 노사, 젠더, 지역, 세대 갈등이라는 우리 사회의 주요 어젠다를 끌고 들어온다.
애견용품업체가 남성 혐오 단어로 지목된 ‘허버허버’와 비슷한 ‘허버버법’이라는 문구를 마케팅에 활용해 사과문을 작성(진정성 실전편)하고, 환경을 마구 오염시키는 방식으로 프러포즈(손에 손잡고)하는 에피소드가 담겼다.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대화(새로운 마음)를 통해 은근한 성차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조명한다. 각 에피소드마다 다소 얼마씩 무신경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동어 반복의 주체가 되며,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폭력적이다.
영화가 주장이 담긴 사회 이슈임에도 ‘비분강개’가 아니라, 농담이라는 형식을 끌고 온다는 점 역시 인상적이다. 첨예한 갈등 이슈를 블랙코미디 형태로 가공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담론의 영역이나 진영 논리로만 다루지 않고 유머 속에서 폭넓게 문제의식을 펼쳐놓는다.
그동안 기득권과 이에 핍박받는 이들의 대결 서사를 자주 봐왔으나, 이는 우리 사회의 첨예한 갈등의 본질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기득권 적의 소멸이라는 해법을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다 보면, 어떤 사회가 더 바람직한지 묻는 진짜 어려움을 외면하기 십상이다. 진영적 거대 담론에 기여하는 서사만을 의미 있게 여기는 과정에서 기득권과 이에 대한 저항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는 일상의 폭력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외면하는 모습도 우린 자주 봐왔다.
영화는 ‘을’들 안에서도 저마다의 위계가 발생하며, 소속이나 집단 정체성과 무관하게 모든 관계 속에서 성찰하는 자세가 없으면 을들도 같은 을이나 병을 향한 무비판적인 폭력에 가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섯 편 중 한 편인 ‘당신이 사는 곳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가 이 문제를 정면에서 마주하는 작품이다.
을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갑 정체성으로 뒤바뀔 때, 손쉽게 차별에 동참하는 모습을 비추면서 자신의 처지로부터 공감 능력을 확장하지 못하는 우리 시민 사회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을에 대한 구원은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만으론 충분치 않으며, 실은 공감 능력의 결여가 핵심 문제임을 드러낸다. 바람직한 공동체에 대한 상상이 없는 담론은 타인을 품지 못하는 개개인의 권익 보호에 그치며 공허해진다.
소비자 주의를 정면에서 풍자한 ‘진정성 실전편’ 역시 시민 없는 진정성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영화가 농담과 냉소를 위태롭게 오가는 가운데 희망도 비관도 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처지가 남겨진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