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처럼 구겨진 정찰풍선, 눈으로 확인한 美中 신냉전 [횡설수설/이철희]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6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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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미국이 ‘키 홀(Key Hole·열쇠구멍)’이라는 코드네임을 가진 최초의 첩보위성을 운용하기 시작한 것은 정찰기 U-2가 소련군에 격추된 사건 직후였다. U-2기 격추는 미소 정상회담 취소까지 낳으며 냉전 완화 기류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었다. 데이터 전송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선 쏘아올린 지 한 달도 안 된 위성을 떨어뜨려 필름을 회수한 뒤 분석하는 고비용 방식이었지만 U-2 격추의 파장을 감안하면 가치 있는 투자였다. 그렇게 첩보위성의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미국의 정찰용 풍선은 항공기와 함께 소련과 동구권 감시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그때도 대외적 목적은 ‘기상 연구’였다.

▷4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유명 관광지 머틀비치를 찾은 이들은 심상찮은 굉음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영화 ‘탑 건’을 떠올릴 만한 광경을 목격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전투기 3대가 풍선 주변을 선회하더니 그중 한 대가 다가가 미사일을 발사했다. 폭음과 함께 찢어진 풍선은 그대로 바다로 추락했다. 중국 ‘정찰풍선’으로 의심되는 비행체가 일주일 동안 미 본토를 횡단한 뒤 최신예 스텔스전투기 F-22의 공대공미사일을 맞고 추락하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환호를 불렀다. 한 주민은 이렇게 전했다. “희고 동그란 공이 별안간 구겨진 크리넥스처럼 됐다.”

▷첩보 활동의 생명은 은밀함에 있다. 하늘에서의 정보 수집은 물론 온갖 위장수단을 동원한 스파이 작전도, 사이버 해킹에 의한 정보 탈취도 눈에 띄어선 안 되고, 들키더라도 발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육안으로도 보이는 ‘정찰풍선’이 대놓고 미 영공을 침범했다. 물론 중국은 “우발적 사고”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이 정찰풍선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벌써 몇 년 전부터라고 미 국방부는 새삼 공개했다. 나아가 그 풍선이 민감한 군사기지, 특히 핵미사일 격납고 상공을 지나간 것에 미국은 주목하고 있다. 결국 정찰의 결정적 증거는 수거한 풍선 잔해 분석을 통해 밝혀낼 장비의 수준과 거기 담긴 정보에 달렸다.

▷이번 사건으로 모처럼 해빙 무드에 접어들던 미중 관계는 또다시 냉각이 불가피해졌다. 당장 미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 취소를 불렀고 미국 정가엔 여야 간 ‘중국 때리기’ 경쟁을 한층 가열시켰다. 공화당은 격추 명령이 늦었다며 “경기 끝나고야 쿼터백을 태클하는 격”이라고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난했다. 그래서 미중 간 전략적 안정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중국이 왜 이런 대담한 도발을 했는지 의구심을 낳는다. 일각에선 중국 군부 또는 강경파의 사보타주 가능성도 나온다. 어쨌든 그 정체도 의도도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미중 신냉전 갈등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는 점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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