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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썩은 육신에서 삶의 진실을 마주하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입력 2022-08-15 03:00업데이트 2022-08-1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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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시체를 보다
19세기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나오는 주인공 햄릿의 연인인 오필리아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미모와 죽음을 병치시켜서 상황의 비극성과 여성의 아름다움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장의사나 장례지도사처럼 직업상 시체를 자주 대해야 하는 이들 말고, 일반 사람들이 시체를 보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대개 시체를 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누구도 야산에서 변사체를 발견하거나, 문을 열었을 때 목맨 시체가 매달려 있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시체 그림이라도 보기를 원한다.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가 좋은 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오필리아’가 바로 시체를 그린 그림이다. 오필리아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나오는 주인공 햄릿의 연인이다. 사랑하는 햄릿의 칼에 아버지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오필리아는 물에 빠져 죽어간다. 시리도록 창백한 얼굴 묘사는 오필리아가 얼마나 실의에 빠진 상태인지 보여주고, 힘없이 벌린 팔은 오필리아가 살려고 발버둥치는 게 아니라 힘없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모든 요소는 죽어가는 이 젊은 여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표현하는 데 봉사하고 있다.

밀레이가 갓 죽은 혹은 죽어가는 상태를 포착한 데는 이유가 있다. 미모와 죽음을 병치시켜서 상황의 비극성과 여성의 아름다움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것이다. 가장 비극적이지만 가장 아름답기도 한 이 오필리아의 마지막 순간을 다 함께 보자고, 밀레이는 관객을 초대한다. 이 초대장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밀레이의 목적은 달성될 수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의 시체도 죽으면 곧 부패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부패해서 추해진 그 시체를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추한 장면을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있다. 중세의 어떤 수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육체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피부 껍데기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 만약 누군가가 여자의 콧구멍, 목구멍, 똥구멍에 있는 것을 상상해 본다면, 더러운 오물밖에 떠오르는 게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수도자들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그리는 대신 아름다운 여자 시체를 벌레가 파먹고 있는 모습을 구태여 그리고 보았다.

1870년대 고바야시 에이타쿠가 그린 ‘구상도’ 일부. 사진 출처 대영박물관 홈페이지
일본에도 아름다운 여인 시체가 어떻게 부패해 가는지를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라고 권하는 그림이 있다. 방치된 시체가 들짐승에 의해 먹히고 결국 뼈와 가루만 남게 되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나누어 그린 ‘구상도(九相圖)’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 승려들은 이 구상도를 통해서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그 몸에 있는 해골을 상상하라! 아무것도 실체가 없다!

그림으로 그려지기 전, 이 구상도의 가르침은 일찍부터 인도에 존재했다. 석가모니 사후 100년 안에 고대 팔리어로 작성되었다는 인도 불교 경전 맛지마니까야(Majjhima Nikaya), 그중에서도 대념처경(大念處經·Satipa33h ̄ana Sutta)에 바로 구상도의 가르침이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승려들은 몸과 자아가 영원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새기기 위해 시체가 썩고 분해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이때만 해도 시체의 성별이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시체의 성별이 여성으로 특정된다. 마침내 시리마(Sirima)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시체가 등장한다. 왜 아름다운 여체가 등장한 것일까. 여체를 등장시킴으로 인해 존재의 무상함뿐 아니라 욕망의 덧없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부사 잇초가 미인 오노노 고마치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린 ‘구상도’ 일부. 방치된 시체가 들짐승에 의해 먹히고 뼈와 가루만 남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나눠 그린 것이 ‘구상도’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 변태적인(?) 가르침이 일본의 구상화 전통이 되면서, 그 시체의 주인공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 이를테면 미녀로 유명했던 단린 황후(檀林皇后) 다치바나노 가치코(橘嘉智子·52대 사가 덴노의 정실)나 궁정 시인 오노노 고마치(小野小町) 등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평민이 아니라 귀족의 여인이라는 점은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결국 해골이 된다는 가르침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다.

어떤 구상도에는 ‘구상시(九相詩)’라는 이름으로 한시가 첨부되어 있기도 하다. 그 작자는 일본 고승 구카이(空海)와 중국 문인 소식(蘇軾)이라고 되어 있는데, 물론 이들이 실제로 쓴 작품은 아니다. 그들이 유명한 인물이고 또 그들의 생각이 구상도의 메시지와 통하는 면이 있어서 이름을 빌린 것에 불과하다.

시체를 직면하는 전통은 현대에도 지속된다. 1980년대에 롭 라이너 감독이 만든 영화 ‘스탠바이미’는 실종자의 시체를 찾아 떠나는 네 명의 철부지 소년들을 그린 영화다. 천신만고 끝에 그 소년들은 마침내 시체를 발견한다. 막상 시체를 두 눈으로 보고 나자 그들의 마음은 더 이상 시체를 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인생이란 유한하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엄연한 사실, 모두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과 허무의 물결을 이럭저럭 헤쳐 나가고 있음을 철부지들조차 깨닫게 된 것이다.

21세기 한국, 옛 그림이나 뒤적이는 중년 남자로서, 나도 가끔 내 십이지장과 대장에서 조용히 썩어가고 있을 오물과, 희고 고운 피부에 가려져 있는 내 해골바가지를 떠올린다. 물론 직접 보고 싶지는 않다. 상상만으로도 똥과 뼈는 세속의 허영으로 향하던 내 마음을 가만히 돌려세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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