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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천광암 칼럼]윤석열, 고이즈미, 트뤼도의 도어스테핑

입력 2022-07-04 03:00업데이트 2022-07-04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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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간결하고 함축적… 트뤼도, 설명의무 이행 모범
갓 시작한 尹, 신선하지만 전략 부재
야당·기자 아닌 국민 봐야 성공
천광암 논설실장
“위험할 수 있다” “스스로 판 무덤이 될 수도 있다” “원고를 안 읽으면 사고가 난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공식 일과로 굳어져 가고 있는 ‘출근길 약식회견’(도어스테핑)을 놓고 야권에서 나온 반응이다. 차례로 더불어민주당의 우상호 비상대책위원장과 윤건영 의원,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말이다.

이들의 부정적 전망에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도어스테핑이 ‘100% 리스크’라고만 볼 일은 아니다. 해외를 보면 성공 사례가 적지 않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와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비근한 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막후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파벌정치 관행을 과감히 깨고 국민에게 직접 다가가는 ‘극장 정치’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당내 비주류였던 그가 자민당 주류의 거센 저항을 이겨내고 굵직굵직한 개혁 작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무기 중 하나가 도어스테핑이었다.

고이즈미식 도어스테핑의 특징은 간결과 함축이었다. 질문 수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지만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대개 8초를 넘기지 않았다. 방송 편집 과정에서 자신의 발언 영상 일부가 잘려 나가 메시지가 왜곡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짧은 문구 안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아낸 것. 이는 ‘One Phrase Politics(한 문구 정치학)’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고이즈미식 도어스테핑에 정략적인 구석이 없지 않다면, 트뤼도식 도어스테핑은 정치 지도자가 국민에 대한 ‘설명 의무’를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경우다. 트뤼도 총리는 팬데믹 초기이던 2020년 3월부터 관저 문 앞에서 아침 도어스테핑을 시작했다. 장소만 도어스텝(문간)이었을 뿐 실제 내용은 공식 기자회견에 가까웠다. 두툼한 노트를 들고 나온 트뤼도 총리가 코로나 관련 주요 현안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하고 온라인으로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다 보면 30분을 훌쩍 넘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트뤼도 총리는 2020년 3월 이후 110일 동안 80차례나 도어스텝 회견을 했다. 이는 코로나 극복 과정의 한 상징이 됐고, 그가 지난해 9월 조기 총선을 치르고 3연임을 하는 데 중요한 동인 중 하나가 됐다.

이에 비하면 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은 갈 길이 멀다. 고이즈미식 절제와 여운도 없고, 트뤼도식 성실함과도 거리가 멀다. 전략 부재에, 메시지는 뒤죽박죽이다.

물론 1년에 한두 번 하는 기자회견조차도 이 핑계 저 핑계 들어가며 안 하려고 한 전임자들에 비하면 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은 신선한 충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보다 정치 문화가 후진적인 일본에서조차 20년째 이어지고 있는 도어스테핑을 놓고 언제까지 “신선” 운운하면서 자기만족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참가에 의의’ 수준에서 벗어나 질적인 업그레이드를 서둘러야 할 때다.

우선 도어스테핑은 도어스테핑일 뿐이다. 한국은 이미 세계 10위 경제대국이고 사회 각 분야가 급속히 다원화된 나라다. 대통령이 발걸음을 잠깐 멈춰 세우고, 불쑥 날아드는 질문에 일도양단으로 답할 수 있는 수준의 현안은 많지 않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면 ‘주 52시간제’와 같은 중대 현안을 대통령이 나서서 꼬이게 만드는 일들이 수시로 재연될 것이다. 단답형 도어스테핑은 그것대로 하되, 복잡한 현안을 다루는 고밀도 소통은 약식이 아닌 정식 기자회견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점은 윤 대통령의 입이 향해야 할 ‘청중’은 야당도 아니고, 눈앞의 기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청중을 눈앞의 기자로 착각하면 “대통령은 처음이라… 어떻게 방법을 알려주시라” 같은 엉뚱한 답변이 나온다. 입이 야당을 향하면 “과거에 민변 출신들이 아주 뭐 도배를 하지 않았습니까”와 같은 문제 발언이 나온다. 청중이 국민이라고 생각했다면, ‘민변 도배’ 같은 짓을 하지 말라고 선거에서 소명을 부여받은 대통령의 입에서 과거 정권을 구실 삼아 똑같은 행태를 되풀이하겠다는 말이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이 의식해야 할 청중은 오직 국민뿐이다. 단 한순간도 카메라 너머 있는 국민들의 눈과 귀를 놓쳐선 안 된다. 그래야 도어스테핑이 심각한 정치적 리스크로 비화하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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