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정말 푸틴을 전범 재판에 회부하고 싶을까 [이진구 기자의 대화, 그 후- ‘못 다한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23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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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진 전 ECCC국제재판관 편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국제 전범 재판에 회부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하지만 국제사법재판소(ICJ)는 국가간 분쟁만 다루는데다 당사국이 모두 동의해야만 재판을 열 수 있고, 국제형사재판소(ICC)는 개인을 재판할 수는 있지만 궐석재판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푸틴을 잡아오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죠. 백강진 전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전범특별재판소(ECCC) 국제재판관을 인터뷰한 것은 우리가 이 전쟁범죄를 심판할 방법이 정말 없는지 답답했기 때문입니다.

선문답 같은 대답이지만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면 없고, 있다고 믿으면 있었습니다. 당장은 못하지만, 국제사회가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심판하겠다는 의지와 각오를 잃지 않는다면 할 수 있다는 것이죠. ECCC같은 특별재판소를 만들어 재판을 시작하고, 추후 푸틴이 실각하기를 기다려 형을 집행하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크메르루주 전범 재판도 특별재판소 설립요청에서 재판이 끝나는데 무려 25년이 걸렸으니까요.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빼앗긴 1979년부터 따지면 무려 43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푸틴을 단죄하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내법과 달리 국제법은 힘의 논리가 우선입니다. 선한 의지를 실현시키려면 그만큼 강한 힘이 필요하지요.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게 러시아가 아니라 북한이었다면 아마 그 즉시 그린베레나 네이비실 같은 특수부대가 출동해 잡아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현실적으로 러시아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인 미국이 얼마나 그 의지를 실행할 각오가 돼있느냐가 푸틴 전범 재판을 여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정말 그 정도의 의지가 있을까요.

물론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푸틴을 전범이라고 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와 함께 우크라이나에 전쟁물자도 지원하고 있지요.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ICC를 정식으로 지원하는 게 법적으로 가능한지도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미국이 ICC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뭔가 굉장히 공허합니다. 미국 정부의 행동이 쇼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푸틴 전범 재판을 열고 싶다면 ICC지원을 검토하는 게 아니라 먼저 회원국으로 가입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닐까요.


백 전 재판관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미군 범죄에 대한 ICC 조사를 막은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수십 년간 내전 상태였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만 반인도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아프간 정부군뿐만 아니라 미군 및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저지른 범죄도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ICC가 2020년 3월 미군 범죄에 대한 파투 벤수다 소추관의 수사 개시를 허가했지요. 그랬더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발동해 ICC 수사에 직접 관여하는 인사들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고 이들과 직계가족, 피고용인의 미국 입국을 금지했습니다. 전쟁범죄를 수사하는 사람들의 자산을 동결하다니요? 더욱이 벤수다 소추관은 그 전해에 이미 미국 입국 비자를 취소당했습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ICC의 수사개시 허가 결정에 대해 “법적 기구인 양 행동하는 무책임한 정치적 기관이 내린 참으로 놀라운 조치”라고 비난했습니다. 누가 했는지 모르고 들으면 북한 조선중앙TV의 리춘희 아나운서 말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 외교부 산하 외교안보연구소는 ‘ICC의 미군 전쟁범죄 수사개시결정과 우리 외교에의 함의’라는 분석보고서를 냈습니다. 이 보고서는 ‘미국복무요원보호법’(American Servicemembers‘ Protection Acts)도 설명하고 있는데, 2002년 제정된 이 법은 미국인의 신병을 ICC에 인도하게 될 ICC회원국에 대한 군사적 원조를 금지합니다. 또 미국인이 ICC에 의해 구금된 경우 대통령은 구출을 위해 적절하고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권한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모든 조치에는 군사력 사용도 배제하지 않고 있지요. 그래서 이 법에는 일명 ’헤이그 침공법‘이라는 오명이 붙어있습니다. ICC본부가 헤이그에 있기 때문이죠. 보고서는 또 ’미국은 ICC설립 초기부터 전 세계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는 미군에 대해 전쟁범죄 등을 이유로 한 ICC의 기소가능성을 우려해 이에 대비한 여러 가지 국내적, 국제적 방지장치를 마련해왔다‘고 설명합니다.

아무리 힘이 우선인 국제법이라 해도 그것이 재판인 이상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절차와 형식이 필요합니다. ICC가 궐석재판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피고의 항변권을 보장하기 위해서지요. 내가 저지른 범죄를 지적하면 “시끄러워”하면서 남의 범죄는 재판하겠다고 하면 우습지 않습니까? 설사 열린다 해도 그 판결에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수긍할까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나치 전범 재판을 열자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은 즉결 처분하지 않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수석 검사를 맡았던 미국의 로버트 하윗 잭슨 연방대법관은 “이 재판에서 일부는 무죄를 받고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걸 허용하는 게 문명이다. 처벌만을 위해 만들어진 법원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이 재판의 실제 원고는 문명이다”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인류를 퇴행시킬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우리가 조금씩 전진해온 건 이런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푸틴의 전쟁범죄를 어떻게 단죄하느냐는 우리가 이 지구에 남아있을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증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침략자와 침략을 옹호하는 사람들, 그리고 범죄에 눈감은 자들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괴물들의 세상입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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