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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150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신라왕의 유골[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입력 2022-01-11 03:00업데이트 2022-01-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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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황남대총 북분 왕비무덤에서 출토된 높이 27.5㎝의 신라 금관(국보 191호). ‘산(山)’자형 3단 구조로 균형미가 돋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역대 왕은 56명이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경주 곳곳의 거대 무덤에 묻혔겠지만 어느 무덤이 누구의 능인지 단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조선 후기에 박·석·김씨 문중이 간략한 옛 기록에 근거해 왕릉으로 비정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릉원 일대에 즐비한 무덤들의 경우 전 미추왕릉을 제외하고는 관련 기록이 부족해 대부분 왕릉으로 비정받지 못했다. 높이 23m, 길이 120m 규모의 황남대총조차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근거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1970년대 초 이 무덤에 대한 발굴이 전격 결정됐다. 1971년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되자 그것을 지켜본 대통령이 황남대총(당시 98호분) 발굴을 지시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발굴은 곧바로 시작되지 못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기술로는 그토록 큰 무덤을 제대로 발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 연습 삼아 발굴한 ‘기적의 천마총’

고민을 거듭하던 문화재관리국은 황남대총 발굴에 앞서 인근에 위치한 155호분을 연습 삼아 먼저 파보기로 하고 1973년 4월 6일 발굴에 착수했다. 그렇지만 무덤 규모가 지름 47m, 높이 12.7m에 달해 발굴이 만만치 않았다. 봉분 조사가 끝나갈 무렵인 7월 3일 발굴 현장을 찾은 대통령이 98호분 발굴에 조속히 착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무게중심이 98호분 쪽으로 쏠리는 듯했으나 7월 25일 금관이 출토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비록 유골은 출토되지 않았으나 출토된 유물의 수준에 근거해 무덤 주인공을 지증왕으로 특정하는 견해가 제기됐다. 그런데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최고의 보물은 여전히 고고학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8월 22일 부장품 궤짝에 쌓인 말갖춤을 들어올리자 그 아래에서 갈기를 휘날리며 하늘을 나는 모습의 천마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작나무 껍질 위에 찬연한 색조로 그려진 유려한 그림 2장. 천마도가 1500년 동안 원래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고, 돌무지와 흙더미로 구성된 봉분의 엄청난 무게를 견뎌낸 것은 실로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무덤은 발굴 후 천마총이란 새 이름을 얻었다. 왕릉 발굴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려 연습 삼아 파 본 무덤이 일약 왕릉급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서 학계에선 황남대총을 굳이 발굴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볼멘소리까지 나왔다.
○ 서역산 보석과 함께 묻힌 왕비

황남대총 북분에서 나온 은허리띠 장식. 날카로운 도구로 새긴 ‘夫人帶(부인대)’란 글자가 또렷하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대통령의 지시를 어길 수 없었기에 조사단은 1974년 7월 7일 98호분 발굴의 첫 삽을 떴다. 98호분은 2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연접되어 표주박 모양을 띠고 있었다. 먼저 북쪽 봉분부터 파 들어갔지만 155호분을 함께 발굴해야 하는 등 여력이 부족해 봉분 조사에만 꼬박 1년 이상이 걸렸다.

10월 28일 조사원들의 손길이 마침내 목관 내부에 접근했다. 목관 범위 전체를 뒤덮은 검은 흙을 차례로 제거하자 금관, 금과 유리로 만든 목걸이, 금팔찌와 금반지, 금허리띠가 가지런히 모습을 드러났다. 이튿날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무덤 주인공은 5세기대 신라왕으로 확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발굴이 끝나갈 무렵 은허리띠 장식에서 ‘夫人帶(부인대)’란 글자가 확인되면서 북쪽 무덤에 묻힌 인물은 왕이 아닌 왕비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발굴이 끝난 후 출토 유물 가운데 외국에서 들여온 명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구려산 금귀걸이, 서역산 보석 장식 금팔찌, 중국 남조에서 들여온 청동 다리미와 도자기, 동로마와 페르시아산 유리그릇 등이 그것이다. 황남대총 북쪽 무덤은 한 번 무덤을 쓴 다음 다시 사람이나 물품을 추가로 묻을 수 없는 구조이다. 따라서 무덤 속 유물들은 왕비의 장례식 때 함께 묻힌 것이다. 이처럼 세계 각지의 여러 공방에서 정성스레 만든 명품들이 한 공간에 묻힌 것은 발굴 역사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 황남대총 주인은 내물왕? 눌지왕?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고구려와 중국은 물론이고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된 서역 보석까지 세계 각지의 명품이 다수 출토됐다. 황남대총에서 나온 높이 7㎝의 동로마산 유리잔(보물 624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남쪽 무덤의 경우 북쪽 무덤보다 한 달 늦게 발굴이 시작됐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조사가 많이 지연됐다. 1975년 6월 30일, 조사원들의 손길이 비로소 목관 내부로 향했다. 북쪽 무덤에 묻힌 인물이 왕비일 공산이 커졌으므로 남쪽 무덤이 왕릉임은 더욱 분명해졌다. 따라서 머지않아 금관이 출토될 것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막상 금관이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한 곳을 팠을 때 그곳엔 금관이 없었다. 그 대신 금동관 조각이 흩어져 있었고 치아가 촘촘하게 박힌 하악골과 함께 금, 유리, 비취를 엮어 만든 장식품만이 드러났다.

더 당혹스러운 건 이튿날 대통령의 방문이 예정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일정은 대외비였지만 조사단은 이를 대략 짐작하고 발굴 현황에 대한 보고를 준비했다. 대통령의 방문 일정에 맞춰 금관을 공개할 계획이었는데 금관이 없었으니 낭패였다. 설상가상 그날 아침 모 신문은 1면 톱기사로 ‘경주 황남동 고분에서 또 금관 출토’라는 오보까지 냈다.

오후 4시 대통령이 발굴 현장을 찾아 조사원들을 격려했고 유골에 깊은 관심을 보이자 조사원들은 비로소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금관의 빈자리를 1500년 만에 세상으로 나온 왕의 유골이 메워준 것이다. 전문가들이 치아를 감정한 결과 왕의 나이는 60세 전후로 추정됐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인골을 터부시했기에 조사단은 이 유골을 다시 왕릉 속에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학계에선 황남대총에 묻힌 인물이 내물왕인지 눌지왕인지를 둘러싸고 지금도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논쟁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었던 왕의 유골에 대한 상세 연구가 불가능해졌으므로, 이제 황남대총 주인공의 신원을 밝힐 길은 왕릉에서 출토된 수만 점의 유물에 대한 정치한 연구밖에 없다. 머지않은 시점에 관련 연구가 진척을 보여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무덤에 묻힌 왕이 누구인지 밝혀지길 기대한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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