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선희]코로나 시대의 신예기…바꾸고, 줄이고, 맡기기

박선희 산업2부 차장 입력 2021-09-17 03:00수정 2021-09-21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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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산업2부 차장
명절 연휴 끝 온천 노천욕장에 모여 앉은 아주머니들이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다들 초면인데도 신세한탄과 남편 흉이 어우러지면서 이야기꽃이 피었는데, ‘말도 마라, 우리 집은 더하다’며 이어지던 수다 끝에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명절음식 지겹다며 뭐라는 줄 알아요? 간단히 김밥이나 싸 먹재요.”

다들 경악의 탄성을 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김밥이 간단하다고?” “자기가 먹기에 간단하겠지!” 웃음보가 터졌다. 그 남자들은 몰랐다. 입에 쏙 넣으면 그만인 김밥 한 줄을 말기 위해 우리의 어머니들이 얼마나 오랜 정성과 노동력을 쏟아왔는지. 우엉 껍질은 어떻게 깎아 손질하고 시금치는 어떻게 다듬어 데치며 계란과 햄과 당근을 어떻게 일일이 준비해 고슬고슬 갓 지은 밥 안에 넣고 야무진 손끝으로 말아내는지.

오래전 옆에서 주워들은 이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중국 작가 판샹리의 단편 ‘맹물 야채국’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외도로 가정을 떠났다가 돌아온 남자가 아내가 끓인 국을 모처럼 먹는다. 아내는 희멀건 국에서도 기막힌 맛을 냈는데 그는 그것을 ‘맹물국’이라 부르며 좋아했다. 그런데 다시 먹은 국 맛이 이상했다. 예전 그 맛이 아니었다. 왜였을까? 남자는 ‘진짜 고수는 물만 끓여도 맛을 내는 법’이라 믿었다. 하지만 사실 그 ‘맹물국’은 아내가 어렵게 구한 최상의 재료를 며칠씩 고아내 만든 것이었다. 그 사랑과 헌신에서 맹물밖에 못 봤던 그는 가정을 깼고, 이제 그에게 합당한 건 문자 그대로의 맹물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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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게 힘’이라고 하지만 음식에 있어선 좀 달랐다. 남자들은 상 위에 올라온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대체로 무지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작동한 독특한 ‘무지의 카르텔’이었다. 오랫동안 부엌은 여자들의 공간이었고 명절에는 특히 더 그랬다. 그 공간에는 남자들은 모르고, 알 필요도 없는 노동과 정치의 세계가 있었다. 아들에게 그 세계를 영원히 모르게 하고 싶은 어떤 여성(시어머니)은 때때로 악역을 맡았고, 또 다른 여성(며느리)은 너무할 정도로 눈치 없는 남편을 향해 눈으로만 레이저를 쏴야 했다.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명절 기간 부엌에서 사투를 벌인다. 최근 한 잡포털 설문에 따르면 올해도 기혼 여성 55%가 “추석에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응답했다. 스트레스 요인으로 ‘불편한 시댁’(38%), ‘지출 걱정’(33%)에 이어 ‘음식 준비’(28%)가 올랐다. 분 단위 배달 경쟁에 셰프의 레시피를 그대로 재현한 밀키트가 넘치는 시대에도 여전히 먹는 문제가 여성을 옭아매고 있는 셈이다.

‘위드(with) 코로나’ 시대 명절을 슬기롭게 보내는 신예기는 바꾸고, 줄이고, 맡기는 것이다. 명절 음식에도 이런 변화가 필요하다. 무심코 먹어온 그 잡채, 그 나물비빔밥, 실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다. 올해 추석에는 가족을 위해 부엌의 고된 노동을 묵묵히 견뎌온 분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데우기만 하면 ‘딱 그 맛’을 내는 전문 간편식을 적극 활용해 보는 건 어떨까. 인간적으로 그 정도는 남자들이 하자.

박선희 산업2부 차장 teller@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코로나 시대#명절#신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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