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트럼프와 다른 듯 같은 길 가는 바이든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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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과 대좌, 가치-이익 충돌 딜레마 직면
‘자유주의 외투 걸친 현실주의’ 외교 주시

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지난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예정보다 짧은 3시간여 만에 끝났다. 결과도 단출했다. 핵전쟁 위험을 줄이기 위한 ‘전략적 안정 대화’를 조만간 시작한다는 세 문단짜리 공동성명과 본국으로 소환했던 양측 대사를 임지로 복귀시키기로 했다는 합의가 전부였다. 사이버 해킹과 인권 문제를 놓고선 바이든의 비판과 경고에 푸틴은 정면으로 부인하고 반격했다. 기자회견도 따로 했다.

그간 바이든 외교에 후한 평가를 해오던 미국의 조야는 ‘빈손 외교’라며 박한 점수를 주고 있다. 바이든은 “시간이 얘기해줄 것”이라고 했지만, 독재자에게 정당성과 승리를 안겨줬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그래서 이번 회담은 바이든의 몸짓과 말투를 둘러싼 해프닝으로만 기억될지도 모른다.

회담 오프닝 사진촬영 때 바이든은 ‘푸틴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기자 질문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제스처를 놓고 백악관은 부랴부랴 푸틴을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회담 후 기자회견 말미엔 ‘푸틴이 행동을 바꾸리라고 왜 그렇게 자신하느냐’고 묻는 기자를 향해 “대체, 내가 언제 자신한다고 했어”라고 언성을 높였다가 나중에 사과했다.

푸틴은 야릇한 냉소를 띤 채 협박과 회유의 현란한 언사로 상대를 위압하기로 악명 높다. 그와의 만남은 회피하고 싶지만 도전하고도 싶은 위험한 유혹이다. 바이든은 푸틴이 만난 다섯 번째 미국 대통령이다. 이전 대통령들은 푸틴을 만난 뒤 한결같이 낭패감을 토로했다. 예측불가 협상의 달인이라는 전임 도널드 트럼프도 단단히 곤욕을 치렀다.

3년 전 푸틴과 만난 트럼프는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에 대해 “푸틴은 러시아가 한 게 아니라고 했다. 러시아가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해 미국인들을 경악시켰다. 미국 정보기관의 판단을 무시하고 오히려 푸틴을 두둔했으니 ‘반역행위’라고 낙인찍힐 만했다. 평생 사과라곤 모르던 트럼프도 ‘부정어(n‘t)를 빠뜨린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니 바이든에겐 푸틴에 대한 어떤 공감이나 호의 표시도 금기였다. 오히려 푸틴은 과거 자신을 ‘살인자’라고 부른 바이든을 향해 “경험 많고 균형 잡힌 상대”라고 평가했지만, 그것조차 바이든으로선 손사래를 쳐야 할 처지였다. 트럼프와는 무조건 달라야 하는 바이든 외교의 치명적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은 힘이 빠졌다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최다 핵무기를 보유한 핵강국이자 세계질서를 교란하는 도전세력이다. 그럼에도 바이든의 최대 목표인 중국 견제를 위해선 적절히 관리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푸틴을 만난 것도 중-러 연대를 흔들어 보려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운 ‘가치외교’는 야당 인사를 독살하는 야만정권과의 거래를 용인하지 않는다. 백악관은 회담 나흘 만에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예고했다. 인권과 안보를 분리한다면 트럼프와 다를 게 뭐냐는 비판에 서둘러 내놓은 조치다.

지금까지 바이든 외교는 순조로웠다. 트럼프가 무시했던 동맹의 강화, 다자주의 협력, 보편적 가치를 강조했고 국제사회의 환영을 받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미국 외교는 늘 가치와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왔다. 그래서 ‘자유주의의 외투를 걸친 현실주의’라는 비아냥거림도 받았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좌충우돌 달려간 국익 우선의 길을 우아하게 걸으려 한다. 세계는, 특히 중국과 북한은, 바이든 외교가 어떤 진면모를 보여줄지 주시하고 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트럼프#바이든#딜레마#자유주의#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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