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북한 톱스타 여배우의 죽음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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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개봉작 ‘한 여학생의 일기’의 한 장면. 흰 모자를 쓴 여성이 박미향이다. 그는 ‘역적들과 그 관련자’로 몰려 6년 뒤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던 도중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DB
2007년 개봉작 ‘한 여학생의 일기’의 한 장면. 흰 모자를 쓴 여성이 박미향이다. 그는 ‘역적들과 그 관련자’로 몰려 6년 뒤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던 도중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북한에선 잘나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고위 간부나 부자들뿐만 아니라 유명 연예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대중의 사랑을 받던 연예인이 사라지면 사람들에게 주는 충격도 크고 화제가 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유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갖가지 소문만 무성하다.

8년 전인 2013년 박미향이란 여배우도 갑자기 사라졌다. 한국 언론들은 박미향의 실종에 대해 화폐 교환 실패의 희생양이 돼 2010년 공개 처형된 박남기 전 노동당 재정경제부장의 친척이라 숙청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최근 입수한 북한 비밀문서에 박미향 실종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실려 있었다. 영상 시청을 단속하는 ‘109상무’라는 조직이 작성한 ‘콤퓨터(컴퓨터)에 입력시키지 말아야 할 전자화일(파일) 목록’인데, 금지된 북한 영화·음악 목록이 19페이지에 빼곡히 적혀 있다.

박미향의 대표작인 영화 ‘한 여학생의 일기’는 ‘역적들과 그 관련자들의 낯짝이 비쳐지는 영화, TV극’이라는 10번째 단속 항목에 올라 있다. 박미향은 왜 ‘역적들과 그 관련자’에 포함됐을까.

2007년 개봉된 한 여학생의 일기는 박미향을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다. 신세대 북한 여고생이 과학자 아버지와 그를 내조하는 어머니와 갈등을 빚다가 화해한다는 내용이다. 북한에선 김정일이 직접 영화를 다듬어 명작으로 탄생시켰다고 선전했다. 김정일이 영화를 극찬하며 ‘모든 주민이 다 보게 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전 주민이 의무적으로 관람했다. 이 영화는 칸 국제영화제 등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단골로 상영됐다. 서구 지역에서 일반 상영된 첫 북한 영화였다. 영화의 성공으로 박미향은 신세대 스타가 됐다. 그렇지만 불과 6년 뒤에 은막에서 사라졌다.

최근 관련 내막을 잘 아는 소식통을 통해 박미향의 숙청 비화를 들었다.

박미향의 부친은 박광철 외무성 간부처장(인사처장)이었다. 외무성 인사처장은 매우 힘 있는 자리다. 북한에서 가장 선호하는 직업인 외교관들의 해외 파견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 박광철은 딸을 밀어줘 영화 주인공까지 만들었고, 김정일의 극찬까지 받았다.

박미향이 뜨자 많은 남자들이 접근했다. 마침내 당대의 인기 배우 이룡훈이 그의 애인이 됐다. ‘평양날파람’이란 영화로 뜬 이룡훈은 연기를 잘해서라기보다는 돈이 많아 배우가 된 경우다. 북한 영화계는 촬영비나 소품비가 부족해 부잣집 자식들이 돈을 대고 영화 주연을 꿰찬다. 일본 귀국자 출신인 이룡훈은 부잣집 자식들을 거느리고 고려호텔 등 고급 호텔과 식당을 주름잡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애인을 한순간에 빼앗겼다. 박미향을 뺏어간 남자는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의 오른팔인 이룡하 노동당 행정부 제1부부장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노동당 행정부는 돈과 권력을 다 움켜쥔 무소불위의 파워를 갖고 있었다. 이룡하의 아들이 낙점했으니 이룡훈도 어쩔 수 없었다.

박미향은 이룡하의 며느리가 됐다. 그런데 2013년 12월 장성택이 공개 처형됐다. 앞서 11월 말에 그의 심복인 이룡훈과 장수길 행정부 부부장, 장성택 조카인 장용철 말레이시아 대사, 장성택 조카사위인 최웅철은 비밀 처형됐다.

이룡훈의 며느리인 박미향은 가족과 함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게 됐다. 수용소에 끌려가면 제아무리 잘나가던 사람이라도 짐승 취급을 받게 된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수용소 간부들의 성노예가 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얼마 뒤 평양 고위 간부들 속에선 박미향이 수용소로 끌려가다 차에서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차피 자살을 하나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다시 나오지 못하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나 별 차이는 없다.

박미향은 1990년대 최고 스타였던 최웅철과 똑같은 운명이었다. 최웅철은 장성택 맏형 장성우의 딸이 그와 살겠다고 낙점하는 바람에 애인과 결별하고 장성택 가문의 맏사위가 됐다.

최웅철과 박미향의 비극적 운명 이후 요즘 북한 연예인들은 고위 간부 집안과 결혼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숙청될 위험이 비례해 커지기 때문이다. 결혼에 의한 위험 부담은 조금 덜어낼 수 있겠지만, 사실 북한에서 연예인 자체가 안전한 직업은 아니다. 돈과 권력, 명예를 움켜쥘수록 목을 치는 망나니의 칼날과 가까워지는 곳이 북한이기 때문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톱스타#여배우#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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