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은우]순수 왕개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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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최경수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본사 앞에 황소 동상을 새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기존 동상이 작고 못생겼다는 논란 때문이었다. 황소 코가 돼지 코를 닮았다는 비난도 있었다. 2년 후 미국 뉴욕 월가의 황소상 못지않게 ‘잘생긴’ 황소가 완성됐다. 예민한 투자자들은 주가 상승을 뜻하는 황소의 모양에도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요즘은 황소보다 개미가 대세다. 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가 똘똘 뭉쳐 덩치 큰 기관에 맞서기도 하고, 몸집을 불린 왕개미(일명 슈퍼개미)도 급증했다고 한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주식을 100억 원어치 이상 가진 개인이 2800명으로 집계됐다. 이런 왕개미가 2년 새 30% 가까이 늘어났다. 이 가운데 700명은 왕개미 앞에 ‘순수’라는 단어가 붙는다. 기업 오너 일가가 아닌, 순수 개인투자자라는 뜻이다. 왕개미 범위를 10억 원 이상으로 넓히면 4만3800명에 이른다. 개인투자자의 5% 정도인데 보유 주식은 전체 개인보유액의 절반에 육박한다. 지난해 주가가 급등한 데다 부동산에 대한 규제로 주식 투자가 늘어난 때문으로 보인다.

▷순수 왕개미를 꿈꾸는 청년들이 많다. 일명 파이어(FIRE)족이 대표적이다. 경제적 독립(Financial Independence)과 조기 은퇴(Retire Early)를 합친 용어로, 돈을 빨리 모아 조기 은퇴하겠다는 젊은이다. 파이어족의 92.8%가 주식 투자를 선택했다는 100세시대연구소 조사도 있다. 청년 투자자 급증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일본 개인투자자를 뜻하는 ‘닌자 개미’도 청년 비중이 급증했다. 라쿠텐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계좌의 80%가 30대 이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선 청년 투자자를 쑥쑥 자란다는 뜻으로 ‘청년 부추’로 부른다.

▷왕개미는 되기도 어렵고, 유지하기도 어렵다. 2000년대 초 3대 슈퍼개미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압구정동 미꾸라지’ ‘목포 세발낙지’ ‘전주(全州) 투신’ 등이다. 몇천만 원으로 수천억 원을 벌거나, 개인이 투자신탁사 규모로 돈을 굴린 전설적 인물들이다. 투자의 달인들이지만 한 번씩 굴곡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99전 99승을 해도 그 다음 1패로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게 주식 시장이다.

▷요즘 청년들은 투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신기술을 보는 눈이 기성세대보다 낫다. 순수 왕개미를 꿈꿀 수도 있다. 그래도 다걸기(올인)는 위험하다. 노련한 투자자도 실패하는 곳이 증시다. 뛰는 집값과 부족한 일자리에 조급한 마음이 들어도 성급한 다걸기는 결말이 좋기 어렵다. 왕개미 이전에 현명한 투자자가 되는 것이 먼저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순수 왕개미#개인투자자#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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