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꽃 당신[오늘과 내일/김선미]

김선미 논설위원 입력 2021-03-05 03:00수정 2021-03-0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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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나리 닮은 韓 맞벌이가정 할머니
할머니 돌봄 대신 공적 영역이 나서야
김선미 논설위원
딸이 며칠 전 중학교 입학 날 학교생활 참고자료를 받아왔다. ‘선생님께 알려드리는 나의 이야기’란 제목의 질문지였다. 장래희망,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 등을 적는 것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가족 소개였다.

가족 구성원의 이름을 네 명까지 적은 뒤 친밀도를 하트 5개까지 칠하도록 한 표였다. 딸은 엄마 아빠 동생 외할머니를 기입한 뒤 엄마인 내게는 하트를 4개 반, 외할머니에게는 최고점인 5개를 줬다. 그걸 본 순간 떠올랐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가 손자는 침대에 눕히고 자신은 침대 옆 바닥에 이부자리 깔고 누워 도란도란 얘기하던 장면이….

외할머니는 아이들에게 ‘할미’다. 할머니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듣다 보니 할머니와 마미(mommy·엄마)를 합친 말도 된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친정 바로 옆 단지로 이사했던 맞벌이 딸과 사위를 대신해 할미는 손녀 손자를 돌봐왔다. 기저귀 떼는 연습을 시킨 것도, 열이 오르면 밤새 기도하며 곁을 지킨 것도 할미였다. 1980년대 병아리를 감별하며 밤낮 없이 일하는 미국 이민가정의 할머니와 2021년 한국 맞벌이가정의 할머니는 닮아도 너무 닮았다.

지금의 할머니는 어려서 6·25전쟁을 겪고 배울 거 다 배웠지만 가정을 위해 집에 들어앉았던 당신이다. ○○○ 씨가 아니라 누구누구 엄마로 불리다가 이제는 누구누구 할머니로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하교하는 손주를 기다리는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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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기업 부장인 지인의 친정 엄마(73세)는 중학교 3학년 손녀가 생후 90일 때부터 지금껏 ‘할머니의 이중생활’을 한다. 주말에만 경기 고양시 일산의 집에 가고 주중엔 서울 강남의 딸집에 살며 손녀를 챙긴다. 그렇게 돈독한 모녀 관계도 냉랭해진 적이 있다. 코로나19로 딸이 재택근무를 할 때다. 갑자기 집에 붙어 지내게 된 엄마와 딸은 서로 예민해졌다. 딸은 “엄마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100세 시대에 60∼80대 할머니는 몸은 아픈 곳이 많아도 마음은 청춘이다. 할머니는 노래교실에 다니며 자신을 위해 쓸 수도 있는 시간을 손주들에게 바쳤다. 코로나로 여성의 일자리가 특히 위태롭다 하니 아들 부럽지 않게 키운 딸이 직장에서 신경 쓸까 봐 힘든 티도 안 냈다. 손주들이 예쁜 행동을 하면 그걸로 됐다고, 할머니가 진정으로 자신들을 돌본 걸 아이들이 누구보다 잘 알 거라고 했다.

할머니들에게도 피아니스트나 발레리나와 같은 어린 시절 꿈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꿈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와 학교, 공동체가 맡아야 할 돌봄의 역할이 할머니들의 선의(善意)의 희생에 떠넘겨져 있다. 열정페이(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며 열정만을 요구) 못지않은 열정돌봄인 셈이다. 공립초등학교는 왜 그렇게 일찍 끝나야 하는가. 집에서 줌으로 방과 후 수업을 한다는데 그건 또 옆에서 누가 돌볼 것인가.

할머니들이 서운해 하는 것은 인생 후반부를 쏟는 돌봄에 대해 우리 사회의 경의(敬意)가 부족한 점이다. 할머니의 돌봄은 결코 당연시돼서는 안 된다. 서울 서초구만 10년째 시행 중인 손주돌봄수당도 다른 많은 지역으로 확대돼야 한다. 영화 미나리의 할머니는 나이를 따져보면 요즘 할머니들의 엄마 격이다. 이런 돌봄노동의 대물림은 이제 끊자. ‘할미꽃 당신’은 홀가분하게 고령사회의 청춘을 누려야 한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할미꽃#당신#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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