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시민’ 되신 걸 환영합니다[오늘과 내일/박중현]

박중현 논설위원 입력 2021-01-14 03:00수정 2021-01-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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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자산 갖게 된 청년개미들
책임의식 겸비 경제시민 되길
박중현 논설위원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는 곤충형 외계생물과 지구인 보병들이 벌이는 잔혹한 전투 장면으로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데 영화 속 청춘남녀 군인들은 왜 목숨 걸고 싸우는 걸까. 로버트 하인라인이 쓴 원작 SF소설에 이유가 나온다. 미래 지구에선 자원입대해 2년 이상 복무해야 참정권을 포함한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 보니 우주선을 타고 다른 행성에 떨어져 끔찍한 외계생물과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선 재산 있는 성인 남성에게만 시민권을 줬다. 그 대신 전쟁이 터지면 참전할 의무를 졌다.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혁명 등 근대 시민혁명은 왕과 나라에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뺏기지 않을 권리, 부당하게 세금을 뜯기지 않을 시민권을 쟁취하는 과정이었다. 대한민국 수립 때부터 연령, 성별을 가리지 않고 시민권을 부여받은 한국인들이 그 무게를 잘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한국의 높은 소득세 면세자 비율은 시민으로의 각성을 늦추는 요소다. 역대 정부들은 표를 의식해 고소득층 소득세율을 높이면서 저소득층엔 각종 감면으로 세금을 깎아줬다. 근로자 40%가 소득세를 한 푼도 안 낸다. 연봉이 낮은 2030 청년 직장인들은 세금에 민감할 일이 없다. 4명 중 한 명인 청년 실업자에게 세금은 남의 일이다.

코로나19가 번진 지난해 변화가 시작됐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추면서 주식시장에 불이 붙었다. 작년에만 200만 명의 ‘동학 개미’가 증시에 뛰어들었고 올해 들어 매일 10만 명씩 주식계좌를 새로 열고 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2030 청년이다.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 실패로 집값이 급등하자 월급을 모아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청년들이 주식투자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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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 갖게 된 주식 ‘자산’을 지키려고 청년개미들은 사상 초유의 단체행동도 벌였다. 지난해 11월 정부가 주식 양도소득세 부과 대상을 한 기업 기준 가족합산 10억 원에서 3억 원으로 낮추려 하자 주가 하락과 세금 부과를 걱정한 청년개미들은 청와대와 정치권을 압박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결국 백기를 들고 기준 10억 원을 유지하기로 했고 사태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 소동까지 벌였다. 청년들이 주도한 조세 저항이자 ‘작은 시민혁명’은 이렇게 승리로 끝났다.

요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외국인, 기관투자가가 판 주식을 사들여 코스피 3,000 돌파를 가능케 한 이들을 ‘영웅’ ‘애국자’라고 연일 치켜세우고 있다. 하지만 여당은 ‘코로나 이익공유제’가 본격 추진돼 대기업들이 이익을 뚝 떼어내 ‘자발적’으로 기부할 때 그 회사 주식을 들고 있는 청년개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봤을까. 청년개미들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들의 언행이 주가에 즉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기업 총수를 긍정적 시선으로 주목하는 첫 청년 세대다.

종국에 비극으로 끝난 ‘동학’ 대신 깨어 있는 시민, ‘깨시민’이란 이름을 청년개미들에게 붙여주고 싶다. 좌파청년들이 스스로를 일컬을 때 많이 쓰였지만 사상 처음 ‘경제시민’으로 자각해가는 청년개미에게 훨씬 잘 맞는다. 빚을 내 무모한 투자를 하는 건 깨시민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자산투자는 철저한 자기 책임이 원칙이다. 외국인, 기관투자가와의 힘겨루기에서 전세가 불리할 땐 물러나는 법도 배워야 한다. 공매도 재개 같은 문제엔 무조건 반대하기보다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게 현명하다. 원래 큰 힘에는 크고 작은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깨시민#청년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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