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스러운 장관들[횡설수설/이진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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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실력과 품격을 겸비한 여장부였지만 브로치 하나로 국가 정책의 의중을 담는 섬세함도 가졌다. 2000년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그녀의 브로치를 통해 당신네 의중을 파악한다”고 했는데, 그날 그녀는 ‘악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뜻으로 세 마리 원숭이 브로치를 달았다. 러시아의 체첸 사태 부인을 꼬집었다고 한다.

▷한 나라의 장관들이 국민의 자랑은 고사하고 창피함의 대상이 된다면 말이 될까. 2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이 회의 내내 인사말도 못 하고 발언권을 박탈당하는 초유의 수모를 겪었다. 성추행 피해자를 돌봐야 할 여가부 수장이 내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놓고 “국민이 성인지 감수성을 집단학습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해 상임위가 파행됐는데, 여야가 장관이 말하지 않는 조건으로 개최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날 회의는 법안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도, 장관의 설명도 없이 진행됐다.

▷같은 날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서울 중저가 지역으로 매수 심리 진정세가 주춤한 양상’이란 말도 비웃음을 샀다. 시장이 진정되고 있다는 뜻인지, 다시 끓어오른다는 건지 언뜻 이해하기 힘든 화법이기 때문이다. 집값은 잡고 싶은데 통계는 반대이다 보니 오죽하면 그런 말이 튀어나왔겠냐는 동정론까지 나왔다. 명색이 법무부 수장인데 법도 절차도 아랑곳없는 추미애 장관, 언제는 공급이 충분하다더니 이제는 “아파트가 빵이라면 밤새도록 찍어내고 싶다”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한국공인중개사협회가 지난달 ‘부동산 산업의 날’ 장관 표창을 안 받겠다고 했을까.

▷인터넷에는 이정옥 장관 외에도 국회 출석 때마다 국민의 화를 돋우는 다른 장관들도 묵언 조치해 달라는 요구가 쏟아지고 있다. 장관의 국회 발언은 그 자체가 정책에 준할 정도로 중요하다. 주무 장관의 말은 기관과 정책의 신뢰성을 더하거나 훼손하는 데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관들의 입을 막아 달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빗발친다면 없는 게 더 낫다는 뜻일 것이다.

▷‘장관 발언 금지’는 사실 망신 주기에 가깝고, 국회의 품격도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는 대통령 눈치만 보며 현실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군색한 변명만 늘어놓은 장관들 스스로가 초래한 면이 크다. 입을 열 때마다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칠까’ 걱정이 되고, 듣고 나면 딴 나라에 알려질까 창피하니 왜 부끄러움은 늘 국민의 몫인가.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미국#최초#여성 국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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