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 형, 펀드가 왜 이래?’[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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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들의 세계’ 전락한 한국 펀드시장
고장 난 ‘펀드 자본주의’ 수술대 올려야

박용 경제부 차장
박용 경제부 차장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를 수술대에 올린 ‘집도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76)의 이름이 뜬금없는 데서 등장했다. 거액의 펀드 사기 혐의를 받고 있는 옵티머스자산운용의 로비 창구로 의심을 받고 있는 고문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경제 원로의 명성에 큰 금이 갔다. 한국 펀드시장은 중병이 들었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옵티머스 사태의 기본 틀은 19세기부터 반복된 ‘폰지 사기’와 비슷하다는 게 검찰의 분석이다. 투자 수익을 약속한 뒤 다른 투자자의 돈을 끌어와 돌려 막으며 돈세탁을 거쳐 투자금을 빼돌린 전형적 사기수법이라는 거다. 옵티머스 펀드 자금 5100억여 원 중 절반 정도가 ‘돌려 막기’에 쓰였고 4000억 원 정도는 돈세탁을 거쳐 누군가 주머니에 녹아 들어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는 말도 들린다. 한 금융 전문 변호사는 “유동화 작업이 필요한 공공기관 매출 채권으로 투자자를 속이고 공공기관들의 기금과 유력 인사를 고문으로 끌어들인 수법은 한국 금융계의 약한 고리를 잘 아는 ‘꾼’의 냄새가 난다. 배후엔 대담한 ‘매스터마인드(범죄 지휘자)’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금융사고 규모는 3108억 원으로 전년보다 1812억 원(139.8%) 늘었다. 100억 원이 넘는 대형 사고는 2018년 1건에서 6건으로 증가했다. 그런데도 법무부는 반대를 무릅쓰고 1월 서울남부지검의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폐지했다. 노련한 꾼들은 ‘여의도 저승사자’의 해체를 ‘그린라이트’ 신호로 여겼을 것이다.

금융사기만 문제는 아니다. 투자자들이 맡긴 돈을 굴리는 ‘금융 집사(스튜어드)’들의 일탈과 무능에 대한 불신도 여전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한국 금융사들은 미국 투자은행들이 설계한 파생 금융상품에 멋모른 채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냈다. 당시 한 시중은행장은 “정장을 빼입고 서류 가방을 든 외국계 은행 영업사원들이 들고 온 상품설명서를 제대로 검증하지 못하고 돈을 넣었다”고 후회했다.

10년 넘게 흐른 지금도 ‘깜깜이 투자’는 반복된다. 2015∼2017년엔 없던 환매 연기 펀드가 2018년 10개로 늘더니 올해 7월과 8월 각각 21개, 22개가 발생했다는 게 금융감독원의 자료를 입수한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의 지적이다. 이 중에는 해외 금융상품이나 자산 등에 돈을 밀어 넣었다가 환매 중단된 펀드들이 포함돼 있다.

잘 키운 펀드는 혁신기업 생태계의 동맥이지만 견제 장치가 고장 난 펀드는 멀쩡한 기업 생태계마저 망가뜨린다. 옵티머스 자금 중 일부는 기업 사냥꾼들이나 쓰는 무자본 인수합병(M&A)의 돈줄로 동원됐다. 국민의 은퇴 자산을 굴리는 국민연금은 기금 운용 인력들이 대마초까지 흡입할 정도로 기강이 흔들리고 기금 운용 전문 인력을 제대로 뽑지 못하는데도 한국 기업 경영에 대한 견제 책임까지 압박을 받고 있다. 미국에선 세계 최고 경쟁력을 보유했던 미 기업을 망가뜨리고 1 대 99의 양극화 논란을 불러온 원인 중 하나로 단기 실적과 거액의 배당을 요구하는 ‘펀드 자본주의’를 꼽기도 한다.

펀드에 맡기면 잘될 거라는 ‘펀드 만능주의’도 불안하다. 정부나 정치권은 툭하면 펀드 타령이다. 정부가 수익성과 성장성이 떨어지는 정책사업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려다 보니 정권마다 ‘관제 펀드’들이 생겨난다. 제대로 된 기업을 키우고, 인재를 육성하고, 연구개발 투자를 할 수 있는 여건부터 만들면 자본은 민간에서 흘러 들어올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고장 난 펀드 자본주의를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 나훈아 노래처럼 펀드 투자자들이 ‘테스 형, 펀드가 왜 이래?’라고 따져 묻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다.

 
박용 경제부 차장 parky@donga.com
#한국 펀드시장#옵티머스 로비 의혹#금감원#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금융사기#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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