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신예기[횡설수설/서영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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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秋夕)은 ‘가을 저녁’, 즉 가을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다. 오곡이 무르익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 좋은 날을 가족과 함께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산업화 이후 도시로 떠난 자식들은 아무리 길이 막혀도 고향을 찾아 ‘민족 대이동’을 해왔다. 1996년 강원도에서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일대에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강원도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이번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한 일은 있었을지언정, 고향을 향하는 발길은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했다.

▷코로나19가 우리 민족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언택트 추석’을 강요하고 있다. “추석 때 오지 말그라. 나중에 더 반갑게 만나제이. 사랑한다.” 경북 의성군은 최근 홀로 사는 노인 1873명의 영상을 촬영했다. 머리 위로 ‘손하트’를 그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영상이 객지로 떠난 자식들의 휴대전화로 보내졌다. 자식들보다 더 손꼽아 기다렸을 어르신들이지만 명절을 포기하는 아쉬움보다 학교도 못 가는 손주들 걱정이 앞선다.

▷우리 조상들은 명절과 예법을 중시했지만 융통성이 있었다. 각종 문헌에는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거나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제사나 차례를 생략했다는 사례가 많이 나온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류의목이 지은 ‘하와일록’(1798년)에는 “마마(천연두)가 극성을 부려 마을에서 의논해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는 대목이 있다. 유교의 경전 ‘중용’에는 시중(時中)이란 표현이 있는데, ‘지금 처한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추구한다’는 뜻이라 한다. 코로나 시대에는 감염 방지를 최우선으로 하면서 예를 갖추는 것이 유교적 예법이 될 것이다.

▷안동의 유림 명문가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의 후손들은 26년 전부터 모든 제사는 광복절 하루에 몰아 지내고, 추석 차례는 10월 말 산소를 찾는 걸로 대신한다. 자손 이창수 씨는 “조상을 기리는 마음만 있다면 그 형태는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추석 연휴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가을겨울 코로나19 유행의 양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한다. 예절도 의례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의 건강을 위해서도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고, 친지들과 거리를 두며, 최대한 ‘집콕’ 하는 것이 올 추석 최선의 예법이다. 자식들을 만나지 못해 서운할 어르신들께 손자들이 재롱떠는 동영상을 보내드리고, 영 서운하다면 온라인 제례를 시도하는 등 현명한 선택지도 찾아보면 적지 않을 것이다. 팬데믹(pandemic) 시대의 신예기(新禮記)는 ‘거리 두기’로 완성된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언택트 추석#코로나19#추석 연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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