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은 사람을 정의하지 않는다[카버의 한국 블로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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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폴 카버 영국 출신·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몇 년 전 한 원피스 때문에 세계가 떠들썩했다. 사진 속 원피스의 색상을 두고 파랑인지 검은색인지, 아니면 흰색인지 금색인지를 두고 회사 동기들부터 미국 할리우드 배우들까지 열띤 논쟁을 벌였다. 너무 인기를 끌어 지금도 위키피디아 영문 웹페이지에 ‘The Dress(그 원피스)’라는 제목으로 언급돼 있다. 지난주 한국에서도 원피스 때문에 난리가 났다. 이번엔 원피스의 색상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문제는 ‘적절함’이었다.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검은색과 은색, 흰색 아닌 차를 보기가 어려웠다. 서울의 풍경을 묘사하는 글에 ‘판에 박은 듯한 칙칙한 콘크리트 아파트’라는 문장이 반드시 들어갔다. 내가 처음 입사했던 한국 회사 동기들은 영화 ‘매트릭스’에 검은색 정장과 흰색 셔츠를 입고 등장한 스미스 요원과 그 복제인간들과 다름없었다. 멋진 선글라스를 쓰고 총알을 피하는 실력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한국 사회가 서서히 변하고 있다. 더 이상 흑백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패션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기업의 복장 규정도 완화되어 가끔 편한 옷을 입는 ‘금요 캐주얼데이’ 같은 날뿐 아니라 색이 들어간 와이셔츠, 면티에 반바지를 입는 회사원도 많다. 문재인 대통령과 내각조차 넥타이를 안 멜 때도 많다.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

국회의사당에는 의원들의 복장 규정이 따로 없다고 한다. 의원의 옷차림은 관습 또는 전통이 정한 대로 눈치껏 입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선’을 넘는 기준은 개인의 판단에 맡긴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왜 원피스를 택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여름을 맞아 수많은 기업이 시행하는 것처럼 과도한 에어컨 사용을 줄이기 위해 하계 복장을 착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옷차림의 적절함 여부는 주관적인 문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원피스를 보고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범위 이내라고 판단했다. 물론 다른 옷차림을 보면 나도 눈썹을 치켜올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보다 더 편협한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원피스를 부정적으로 볼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영어에 ‘겉표지로 책 내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는 속담이 있듯 한국에서도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온라인에서는 이번 원피스 사건을 두고 인신공격까지 하는 등 수많은 여성 비하나 여성혐오증과 관련한 악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나는 류 의원이 격식을 차린 딱딱한 몇 명의 의견을 맞춰주는 것보다 본인의 확신을 위해 끝까지 싸우고 싶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회 출석률과 발언 내용 및 정책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의 중요한 정치적 역할 중 하나는 주변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본인의 신념과 소신을 지키는 것이다. 게다가 정치인의 본업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원피스를 입었나, 정장을 입었나는 중요하지 않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각 후보자의 소개 자료를 받고 항상 놀란다. 많은 후보자들이 전과기록을 갖고 있어서다. 해당 의원의 소개 자료를 보지는 못했지만 ‘캐주얼한 원피스 착용 혐의로 실형’이라는 말은 없었을 테다. 하긴 옛날에는 음주운전을 사회 분위기상 그렇게 심각한 범죄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사회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사회는 계속 변화한다. 음주운전뿐만 아니라 정치인의 복장 규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이 엄격해질 수도 있고 더 느슨해질 수도 있다.

영화 ‘킹스맨’에 ‘Manners maketh man(매너가 사람을 만든다)’이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옷은 사람을 정의하지 않으며 그간의 정치 역사를 살펴보면 적절한 복장을 갖춘 정치인들임에도 윤리의식은 현저히 낮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니 양의 탈을 쓴 늑대보다는 빨간 원피스의 소녀를 지켜주자.

폴 카버 영국 출신·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옷#사람#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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